[동아광장/김충식]거짓의 모래성

  • 입력 2001년 3월 9일 18시 51분


김우중씨의 몰락에서 닉 리슨이라는 영국 청년을 생각하게 된다. 2백30년이나 된 은행을 순식간에 말아 먹은 스물여덟살의 은행원 말이다. 95년 그 청년이 일통을 저지르고 달아나다 붙잡힌 곳이 프랑크푸르트다. 공교롭게도 김씨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이 그 프랑크푸르트. 리슨은 붙잡혀 감옥을 살았다. 김씨는 푸랑크푸르트를 떠나 오늘도 지구촌 어딘가를 쓸쓸히 헤매고 있다.

리슨도 한때는 잘나가는 딜러였다. 베어링은행에 한 해 2~3천만달러의 수익을 안겨주는 효자였다. 그래서 연봉 35만달러에다 보너스 2백만달러를 따로 받고 아파트도 거저 살았다. 김우중씨도 한때는 골프장 근처도 안 가본 일중독자로 칭송받고, 진취적인 자세로 성공한 기업인의 표상이었다. ‘세계경영’의 깃발을 치켜들고 코리아를 드높인 ‘애국자’였다.

▼김우중씨 '제 덫' 탓해야▼

두 사람이 일어선 에너지라고 할 들끓는 팽창본능 질주취향도 닮았다. 리슨은 분초를 다투는 투기판이라고 할 선물(先物)시장에서 간 큰 베팅으로 성공했다. 김씨 역시 보통 기업인들이 저지를수 없는 배짱으로 부실기업을 인수하고 정부와 협상해서 부채를 탕감하고 덩치를 키우는 방식으로 재벌이 되었다. 다섯 손가락안에 드는 재벌에 오르고 전경련 회장까지 지냈다.

침몰로 내달은 코스도 닮은 꼴이다. 둘 다 거짓을 되풀이 하고 그렇게 결정적인 ‘한탕’을 노리다 시장(마켓)의 벽에 부딪쳐 깨지고 말았다. 리슨은 당초 얼마의 손실을 만회하기위해 시장의 지수(指數)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려 했다. 지수 끌어올리기 작전에 베어링 계좌만이 아니라 가명계좌까지 들이댔다. 발버둥은 물거품이 되었다. 가라앉던 지수는 공교롭게도 일본의 한신(阪神)대지진으로 아예 폭삭 꺼져 버렸다. 불운이었다.

김씨는 리슨보다 확실히 행운이 길었다. 23조원에 이르는 분식 회계로 수십년을 버틸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김우중 신화에도 먹구름이 오고 거짓의 성을 한없이 쌓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벌이보다 이자가 많을때, 구조조정 시기에 덩치를 키울때, 견딜 수 있는 장사는 없음을 보여주었다. 여러 번 좋던 운도 끝까지, 언제나 좋을수는 없는 법이니까. 리슨도 김우중도 ‘제 덫’을 탓해야 한다.

재벌탑이 속속 무너지고 있다. 96년 부도난 기아자동차는 창업후 52년 동안 한 해도 ‘장부상’ 적자가 난적이 없다. 실상은 딱 1년만 흑자 였다. 51년은 분식회계로 얼버무리다 도산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채권자와 국민에게 떨어졌다. 파산 선고가 난 동아건설 역시 7천억원의 분식결산을 했다고 자백했다. 한보의 분식도 6920억원이었다.

공인회계사들은 무엇을 했나. 분식을 파헤치라고 ‘공인’(certified) 타이틀을 붙이고, ‘자본주의의 파수군’으로 치켜세워 주기도 하는데 회계사들은 무엇을 했나. 전문성과 윤리의식을 기울여 기업의 재무제표와 회계자료를 감사해야할 의무는 어떻게 된 것인가. 회계사들은 ‘관행 때문에’ ‘영업 때문에’ 눈감아 버렸다. 어디서부터 분식으 바로잡을지, 너무 깊고 넓어서 손을 쓸수가 없어 공범이 되고 말았다는 변명이다.

정치 무대의 선거비용 거짓 신고도 바로 우리 사회의 분식질환이 위중한 것임을 보여준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1억2천만원이라는 한도를 지킨당선자도, 지켜지지 않은 실상 대로 적어낸 의원도 없다고 한다. 여야 의원들의 자백이요, 한때 소란했던 선거비용 실사의혹 논란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이 의원들이 국회에서 대우 기아의 ‘분식’을 따지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외칠 것이다.

▼'분식'관행 뼛속까지 스며▼

문화 종교라고 다를것인가. 한국의 기독교 불교등 종교별 신도 수를 합치면 인구를 훨씬 넘는 6천만명쯤 된다던가? 각기 개신교 천주교 조계종등에서 파악한대로 문화관광부가 누계를 내면 그렇다고 한다. 지금도 바로 잡히지않고, 당분간은 고쳐 지지 않을 ‘불가사의’. 부풀리기와 거짓이 뼈속까지 스며든 것을 알수 있다.

인류사에 빛나는 영국 산업혁명에도 일조했다고 자부하는 베어링은행은 단돈 1파운드에 네덜란드의 한 은행으로 팔려갔다. 한 청년의 무모한 한탕, 가명계좌까지 동원한 허가받지 않은 거래(unauthorized dealing)를 막지 못한 댓가다. 분식과 과장으로 얼룩진 거짓의 모래성 같은 한국이 가는 길은 어디일 것인가.

김충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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