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동 뒷골목 허름한 건물틈에 ‘틈새라면’이 있다. 메뉴라고는 ‘빨계떡’ 라면과 ‘불김밥’ 뿐이다. 아는 사람의 손을 잡고 가지 않으면 찾기 힘든 곳이지만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전국 각지에서 입소문을 듣고 온 미식가, 라면 종주국이라는 일본 관광객까지 심심치않게 드나든다.
주인 김복현씨는 이 에세이에 20년간 댓 평 남짓한 가게를 꾸리면서 겪은 에피소드와 음식장사 노하우를 담았다. 거창한 경제이론이나 어려운 경제용어는 없지만 장사 초보자들이 적잖은 도움을 받을 만하다.
돈으로 기준을 삼는다면 김씨는 ‘성공시대’에 출연하지 못할 인물이다. 2500원짜리 라면의 벌이라고 해봐야 봉급쟁이 수준일 뿐이다. 누구나 끓여먹는 라면이 뭐 대단하냐 싶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장사 철학에서 여느 성공스토리와는 다른 ‘성공’의 가치를 발견한다.
고춧가루 계란 떡이 들어간 ‘빨계면’은 김씨가 오랜 시행착오로 개발한 것이다. 맵싸한 맛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국내 여러 라면의 모태가 됐을 만큼 유명하다. 이는 면의 성질, 물의 양, 불의 강도와 시간까지 세밀하게 시험하며 얻은 결론이다. 국물 맛의 핵심이랄 수 있는 고춧가루 양념 비법도 빼놓을 수 없다.
김씨는 이 모두를 ‘정성’이란 말로 요약한다. 라면은 만든지 2주되어 면이 찰진 것을 쓴다, 맛이 달아나지 않도록 빨리 뜨거워지는 양은냄비에다 고열로 순간적으로 끓여 낸다, 보온력 강한 나무그릇에 담아 먹는 도중에 면이 퍼지지 않게 만든다 등의 세심한 배려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주인이 왕’이라는 철학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음식맛이 제일의 서비스’라는 신념에서 ‘규모는 작아도 장사는 넓게 하라’는 교훈을 얻는다. ‘경쟁은 자기 자신과 하는 것이지 남의 집 손님 빼앗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멍가게 주인의 상도(商道)에 뜨끔할 대기업들이 많을 것이다.
무엇보다 ‘빨계면’의 성공은 현대판 장인정신의 소중함을 환기시킨다. 라면 같은 사소해보이는 것에 인생의 승부를 걸고 최고가 되려는 노력. 허명(虛名)을 날리던 기업들이 우수수 쓰러지는 이 사회에 ‘틈새라면’이 쏘아올린 소중한 희망의 메시지다.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은 따로 있지 않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인생에 대한 태도 뿐이다. 비범한 사람은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배운다. 자신의 재능을 알아내는 순간 그들은 화려하게 변신한다”(구본형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중)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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