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데없이 길게 늘어선 휠체어와 장애인들로 가득해 영문을 모르는 승객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은 10분 정도 늦어지는 것에 화를 내시지만 저희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리프트에 30분씩 매달려야 합니다…"
휠체어 27대에 탄 장애인과 휠체어를 밀고가는 또다른 장애인들까지 모두 40여명.
이들은 이날 오후 1시부터 지하철 서울역부터 청량리역까지 모든 역에서 승·하차를 반복하며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 '시위 아닌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정부는 장애인들이 어렵지 않게 외출할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마련해줘야 합니다"
"이러지 말고 청와대로 가요, 청와대로"
열차운행이 계속 지연되자 참다 못한 한 아주머니는 "왜 많은 시민들을 볼모로 이러느냐"면서 "데모를 하려면 밖에 나가서 제대로 하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힘겹게 전철을 오르던 장애인들은 "그랬다가는 다 잡혀갑니다"라며 짧게 응수하고 준비한 유인물을 승객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엄마와 소근소근 이야기를 나누던 한 여자 어린아이는 경계의 눈빛과 무서운 표정으로 엄마 품에 기대며 장애인 쪽으로 팔만 살짝 내밀어 유인물을 받았다. 유치원생에게는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이 무척 두려워 보였던 모양이었다.
장애인 안장호(41·양천구 목동)씨는 친하게 보이려는 듯 웃음 띤 얼굴로 아이에게 유인물을 쥐어주었다. 아이의 태도가 몹시 미안한 듯 그 엄마는 안씨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날 참가자의 휠체어를 밀어주던 한 지체장애인은 장시간의 피로로 열차 안에서 균형을 잃고 쓰러져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주변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신문을 보던 한 대학생은 얼굴을 붉히면서 "장애인이신줄 몰랐습니다"라며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장애인은 "내 다리가 좀 부실해서…"라고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시위에 참가한 27대의 휠체어 가운데 1대는 서울역에서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에 앞바퀴가 끼어 빠져버렸다. 각 역마다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어 휠체어가 이동하기엔 퍽이나 힘들어 보였다.
27대의 휠체어가 지하철에 오르는데 걸린 시간은 10여분. 기관사는 "장애인 여러분들이 단체로 승차하고 있는 관계로 운행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라는 안내방송을 계속 해야만 했다.
참가자들을 인솔한 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교장은 "오이도역 리프트사고 이후 모든 시설을 점검하고 대책을 수립하라고 요구했지만 관계당국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박교장은 "수직형 리프트는 위험하고, 계단에 설치된 고정형 리프트는 한번 타면 20~30분씩 걸린다"면서 "일반인에게 30분 거리가 우리에게는 2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지하철을 이용하던 이찬호(54·구로구 신림동)씨는 "이런 시위는 장애인이나 일반인이나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면서 "하지만 우리나라의 장애인 복지정책은 상당히 낙후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휠체어에 앉아 처음으로 지하철을 탔다는 안씨는 "외출이 잦은 편인데 혼자 다니기는 너무 힘들다"면서 "동정이나 시혜 차원이 아니라 당당한 장애인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지하철공사 조현규 서울역 역무주임도 "장애인의 경우 일반인들보다 3배 정도 시간이 더 걸린다"고 설명했다.
한편 참가자들이 종로5가에 도착할 무렵 외박을 나왔다는 해병대 최용훈 일병이 장애인들을 향해 거수경례를 해 승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최일병은 "내가 저분들의 입장이라도 이렇게 행동했을 것"이라면서 운행지연으로 항의하는 일부 승객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최건일/동아닷컴 기자 gaegoo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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