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전선일/‘구로 투표함’열어 진실 가리자

  • 입력 2001년 3월 14일 18시 22분


1987년 12월 16일의 제13대 대통령선거는 1972년 정권 연장을 위한 수단으로 채택한 유신헌법 이후 대통령 직접선거권을 박탈당한 지 15년만에 대통령을 직접 국민의 손으로 뽑는 역사적인 선거였다. 이 선거는 더구나 6·10 항쟁으로 불리는 국민의 피나는 투쟁으로 얻어진 값진 것이었기에 국민적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자연법 사상의 기반 위에 민주적인 정치기구를 창시한 영국의 정치학자 존 로크는 “인민은 원래 소유한 최고권(주권)을 국가에 양도하지만 만약 국가가 인민에 대하여 전제적 행위를 하거나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인민의 재산을 침해했을 때에는 이의 양도를 철회하고 거부할 권한이 있다”고 함으로써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한 바 있다. 6·10 항쟁은 이 저항권의 행사로서 우리 민주 역사에 길이 기록될 것이다. 이처럼 뜨거운 민주화의 열기 속에 치러진 선거와 관련해 6일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당시 서울 구로구을 선거관리위원회가 운송중인 부재자 투표함을 탈취, ‘부정 투표함’이라며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농성을 벌이다가 구속됐던 M씨 등 3명에 대해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하는 결론을 내렸다. 보상심의위원회 관계자는 “구로구청 사건이 부정선거 방지 및 공명 선거제도 정착 등 민주헌정질서 확립에 기여한 측면이 있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이 결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문제는 그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는데 있다. 당시의 부재자 투표함은 부정선거 투표함이었다는 M씨 등의 주장과 정상적인 투표함이었다는 선거관리위원회측의 주장은 아직도 맞서 있다. 각 주장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주장만으로는 설득력에 한계가 있다.

이런 양측의 주장을 놓고 따지는 것은 소모적인 논쟁이라는 생각에서 나는 현재 그대로 보관돼 있는 문제의 투표함을 개봉해 내용물을 확인함으로써 정상적인 투표함인지 부정투표함인지를 가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실체적 진실을 두고 다툼이 있는 이 사건에 대한 해결책은 이 길뿐이라고 본다. 당사자인 민주화운동가의 명예와 우리나라의 공명선거를 책임지고 있는 선거관리위원회의 헌법기관으로서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부정선거는 아니었지만 부정선거의 개연성’을 운운하며 ‘부정선거 예방 공로’를 인정하려는 태도는 진실 규명보다는 진실 호도에 가까운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부정 투표함이었다면 선거관리위원회는 국민 앞에 당시의 부정선거에 대해 사죄해야 할 것이며, 부정 투표함이 아니었다면 당시의 투표함을 탈취한 관계자는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정상적인 투표를 부정선거로 호도한 책임을 지고 민주화운동가로서의 명예도 반납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정의를 지키기 위한 제도이며, 정의만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그 바탕에는 실체적 진실이 있다. 따라서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전선일(영월군 선관위 사무국장 삼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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