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테가 이 가제트의 「대중의 반역」과 2차 대전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당시로는 놀랄만한 뉴미디어였던 라디오의 출현에 닿아 있다. 미디어 학자들은 라디오를 이용한 전체주의자들의 여론조작과 선동술이 르네상스 이후 유럽을 지배해온 활자매체 시대 지식인들을 무장해제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선동자들의 목소리가 담긴 라디오는 유럽의 지성을 한순간에 마비시켰고 칸트와 헤겔의 나라 독일 국민을 전쟁의 광분상태로 내몰았다.
정보지식사회의 뉴미디어인 인터넷 선진국이라는 21세기 한국땅에서 느닷없이 지난 세기의 파시즘과 나치즘의 공포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상상력일까.
지난 2월 27일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렸던 댄스그룹 HOT의 공연은 백색 유니폼을 갖춰입은 4만5천여명의 소녀팬들로 넘쳤다. 거센 눈보라 속에서 추위를 잊고 열광하는 소녀팬들을 보며 전체주의 선동가 앞에 운집한 거대한 군중을 연상한 것은 다소 비약인지 모른다.
그러나 300여대의 관광버스를 타고 상경한 전국의 HOT 팬클럽 회원들, 노숙을 해가며 공연을 기다리는 열성, 무대를 휘젓는 '우상'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와 뜻모를 동작 하나하나에 괴성을 지르며 광분하는 소녀팬들의 모습은 나치 열성당원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 이같은 공연 모습에 대해 어떤 이는 '백색당 전당대회'라고 거리낌없이 말했다.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낸 대중스타들에 대한 맹신적 추종은 팬클럽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원조교제'에 나선 소녀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그들의 공연에 참석하기 위해 중학교 입학식마저 포기하고 가출한 12세 소녀들의 일탈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기그룹 god의 멤버와 가족에게 불순물이 든 음료를 전달하는가 하면, 그들의 지방 순회공연을 빠뜨리지 않고 보기 위해 '원정'을 가는 관객들도 부지기수다. 어떤 팬은 god 전국 순회공연 입장객의 절반이상이 서울과 수도권 등에서 원정간 팬클럽 회원이라고 밝혔다.
god 팬들이 최근 공연장 변경과 관련해 공연기획사에 대해 거세게 항의하고 심지어 공연반대를 주장한 속사정을 알고나면 대중스타에 대한 그들의 광적 추종심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당초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3회 열기로 했던 god 서울 공연은 폭설로 인한 지붕 붕괴로 공연 횟수를 1회로 줄여 내달 5일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기로 했다.
이에 대해 god 팬들은 야외 공연장은 음질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 등을 들어잠실 주경기장 공연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주경기장 공연을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기존의 3회 공연 입장권을 모두 예매했던 상당수 열성 팬들이 1회 공연으로 축소된 것에 대한 불만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 매체인 인터넷의 확산은 개인을 고립화, 파편화시킬 뿐만 아니라 현실사회의 질서와 공동체 의식을 무너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같은 우려가 끝나기도 전에 과거보다 강력한 새로운 공동체가 온라인상 가상공간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안티사이트 등 온라인상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공동체들은 특정 자동차모델을 반대하는 시위나 상품 불매운동으로 이어지는 등 스스로 권력화하는 양상마저 보인다.
대중스타들의 팬클럽은 파편화한 사회에서 동질성을 확인하려는 10대들의 해방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정보 공유를 통해 그들만의 철옹성같은 왕국을 세워온 팬클럽들은 갈수록 배타적 집단으로 변해가고 있다. 최근 갖가지 반사회적 행태로 나타나고 있는 팬클럽들의 전체주의적 성향이 서구의 사회문제로 대두된 네오나치즘의 양태로 나아갈지 염려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14일 밤 HOT의 리더 문희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3천여명에 이르는 팬클럽 회원들이 서울 흑석동 그의 아파트에 모여들자 질서유지와 사고방지를 위해 경찰병력이 동원됐다. 그 팬클럽 회원들이 오는 17일 서울 강남 도심에서 'HOT 해체반대' 시위를 벌인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우리 사회 한쪽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생존투쟁이 벌어지는상황에서 그들의 아들 딸이 상업적 스타그룹의 해체에 대해 시위 운운하는 것은 놀랍고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이같은 놀라움이 10대들에 대한 기성세대들의 몰이해 때문인가. 팬클럽 문제는 이제 다원화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문화현상로만 취급할것이 아니라 심각한 사회문제로 다뤄야 한다.
HOT 해체설과 관련해 팬클럽 사이트에는 '죽음 불사' 등 극성 팬들의 섬뜩한 구호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가상공간에서 익명으로 떠도는 이같은 선동적이고 극단적인 언어들이 현실공간으로 이어질까 매우 염려스럽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대중스타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연예산업 종사자들과 그들의 상업논리를 무차별 전파해온 매스미디어들이 사회적 책임을 지려는 태도는 보이지않는다.
[연합뉴스 정천기기자]ckch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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