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어느 무기수의 '진실'

  • 입력 2001년 3월 23일 18시 51분


법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인간의 착각이나 편집(偏執), 조작 등에 의해 형벌이 남용된 일이 있다면 국가는 그 피해를 보전(補塡)할 수 있는가. “나는 정말 억울하다”는 한 무기수의 피맺힌 절규가 인간과 형벌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본보 법조팀이 30년 전의 ‘진실’을 추적하고 있는 정진석씨(가명·67) 사건은 70년대 검찰과 경찰이 공권력을 어떻게 행사했는지, 사법(司法)은 또 어떠했는지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씨는 72년 강간살인사건의 피의자로 구속기소돼 1∼3심에서 모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 2개월간 복역한 뒤 87년 모범수로 출소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형벌이 끝난 게 아니었다. 교도소를 나섰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냉대와 멸시뿐이었다. 그는 그 후 줄곧 남도의 한 산골 마을에서 혼자 숨어 살아왔다고 한다.

그런 그가 뒤늦게 결백을 주장하고 나섰다. 정씨의 호소가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죽기 전에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그의 고백이 양심의 소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건 당시 경찰에서 범행을 자백한 것은 경찰의 지독한 고문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를 뒷받침하듯 당시 경찰의 강압을 견디지 못해 허위증언을 했다는 양심선언도 잇따르고 있다. 주요 증인들이 한결같이 애초의 증언을 뒤집고 있고 심지어 정씨의 재판과정에서 당초의 증언은 잘못된 것이라며 사실을 말하자 검찰이 자신을 위증혐의로 구속했다는 증인까지 나타났다.

사건 당시 피해자를 직접 부검했던 전문의의 증언도 충격적이다. 검찰과 경찰, 재판부가 모두 피해자 사망시간과 관련된 자신의 소견서는 무시하고 사건 10일 뒤 피해자를 살펴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연구원의 의견서를 유죄의 증거로 채택했다는 것이다. 이 전문의의 소견서대로라면 정씨의 알리바이가 성립된다는 얘기다. 이렇게 볼 때 수사 및 재판과정의 의혹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물론 우리가 정씨의 무죄를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의를 세우기 위해선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정씨가 99년 11월 서울고법에 낸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질지 여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법의 질서를 지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억울한 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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