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전진우/‘좌장’의 노여움

  • 입력 2001년 3월 29일 18시 31분


지난해 12월 2일 청와대에서 열렸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민주당 최고위원들의 간담회 자리. 최고위원 가운데 최연소인 47세의 정동영(鄭東泳) 의원이 입을 열었다. “위기의 근본은 국민적 불신에 있습니다. 국민의 눈엔 우리 당 권노갑(權魯甲) 최고위원이 YS정권 때의 김현철처럼 투영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지난 대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국정을 보살펴야 합니다.” 정 의원 발언의 골자는 ‘권 최고위원께서 일선에서 물러나 주시는 것이 국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됨’이었다. 실로 ‘엄청난 발언’이었다. 권노갑이 누군가. 반평생을 오로지 김 대통령을 위해 살아온 ‘동교동계의 좌장’이 아니던가. 그런 그에게 ‘새카만 정치 후배’가 물러나라고 하다니.

▷기가 막혔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들뻘인 젊은 의원에게 대놓고 반박하기가 뭣해서 였을까. 아무튼 당시 권 최고위원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순명(順命)’이란 말을 남기고 일선에서 퇴진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의 ‘영원한 동지’인 그의 정치생명이 그걸로 끝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시련은 일시에 ‘스타’로 떠오른 정 의원의 몫이 될 거라고 보는 눈이 많았다.

▷역시 그런 것 같다. ‘3·26 개각’으로 동교동계 구주류가 살아나면서 권노갑씨가 정치권 전면에 재등장했다. 그는 엊그제 자신의 2선 퇴진 발언에 대해 정 의원이 개인적으로 사과하기 전에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동안 가슴에 쌓아두었던 노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꼭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 재작년 ‘옷로비 사건’ 이후 작년 하반기까지 사실상 여권을 주도했던 세력이 동교동계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동안 누적됐던 국정난맥에 동교동계의 탓이 적지 않다. 사실 권씨는 ‘동교동계 좌장’으로서 그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와서 ‘새카만 후배 정치인’의 지난 발언을 두고 공개사과를 하라고 하는 것은 본말이 뒤집힌 격이다. 무엇보다 칠순이 넘은 ‘좌장의 품격’에도 걸맞지 않아 보인다.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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