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나는 문득 생각했다. 지금 이렇게 무심히 바라보는 풍경이지만 언젠가 늙었을 때 문득 내 중년의 어느 봄날과 연상되어 이 그림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기억이라는 것이 이상해서, 억지로 붙잡아 놓으려 해도 그대로 스러져 버리는 게 있는가 하면, 육체의 눈이 무심히 보고 넘어가는 장면을 마음의 눈이 재빠르게 시진찍어 마음의 사진첩에 영원히 담아두기도 한다.
재미있는 건 나의 어렸을 때 사진들은 모두 흑백사진인데, 내 마음 속의 사진들은 모두 아름답고 화려한 칼라 사진들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내 어린 시절 봄에 관련된 사진은 단연 노란색이 두드러진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던 제기동 우리집 근처에는 복개된 넓은 개천이 있었는데 여름이면 온갖 잡초가 무성해 모기의 온상이었지만, 봄이면 이리저리 엉킨 길다란 덤불에서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곤 했다.
하루는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데 그 쪽에서 놀던 아이들이 뛰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이리 와 봐! 사람이 죽어 있어! 빨리!’ 우리들이 우르르 몰려간 그곳에는 정말 개나리 덤불 밑에 검정색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이 모자를 쓴채로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정말로 죽은 듯이 눈을 감고 꼼짝 않고 있었다. 곧 엄마들이 불려 나왔고, 우리는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며칠 동안 굶어서 허기가 져 쓰러져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그를 우리집에 데리고 가서 점심을 주었고, 아이들은 다 우리집으로 몰려와 그가 툇마루 끝에 앉아서 밥 먹는 것을 구경하였다. 물론 내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가 밥을 아주 천천히 먹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책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제목의 시집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날 이후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봄이 되어 개나리를 보면 가끔 그때 그 장면, 눈부시게 샛노란 개나리덤불과 검정색 교복 색깔이 어우러진 그 강렬한 대조가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어느 봄날 개나리 덤불 밑에 앉아 시를 읽다가 허기져 쓰러진 사람’――이렇게 슬픈 기억의 캡셥이 붙은 사진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리운 내 어린 시절 마음의 사진관에 걸려 있는 대표적인 사진 중의 하나이다.
내 어렸을 적 추억의 사진들은 작고 초라한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봄이 되면 골목마다 딱지치기하는 아이들, 애기업고 마실나와 아무데서나 가슴내놓고 젖먹이는 어머니들, 떡장수, 엿장수로 활기에 찼고, 다시 시작하는 계절의 순환에 한 번 더 허리끈을 동여매는 희망과 평화가 있었다.
쓰레기가 드문드문 쌓인 복개된 개천이 이 세상 최고의 놀이터라고 생각한 가난한 아이들과 배가 고파 기절하면서도 시집을 읽는 어리석은 젊은이가 있던 그 시절. 지금은 놀이공원마다 화려한 봄축제 풍선이 현란하고 배는 불러도 마음 속에 구멍이 뚫린 듯, 자꾸 허기가 지는 것은 왜인지….
장영희<서강대교수·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