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주의라면 치를 떠는 진보주의자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일찍이 <의식>(儀式·1971년)이라는 걸출한 작품에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질타한 바 있습니다. 주인공은 어릴 때 만주에서 패전을 맞이한 뒤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집 사쿠라다 가에는 할아버지와 자살한 아버지의 의붓어머니, 이복형제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살고 있었는데, 한때 내무 관료였던 할아버지가 장악하고 있는 이 집안의 핏줄 관계는 실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가부장의 권위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수많은 가족 구성원들의 개인적 성향은 무시되기 일쑤입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개인이 가문에 속해 철저히 지배당하는 모습을 관혼상제의 의식을 통해 그려나갑니다. 획일화된 규범 아래에서 개인의 개성을 무시하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질타하는 것이지요. 탁월한 수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식>뿐만이 아닙니다. <감각의 제국> 역시 그렇습니다. 꼬마가 일장기로 남자의 성기를 건드리며 장난치는 장면을 비롯해 수많은 장면들이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주제로만 평론집이 몇 권씩이나 나와 있을 정도입니다.
오시마 감독같은 진보적인 성향의 학자와 단체들은 물론 지금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맹활약중입니다. 이번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큰소리를 낸 것 역시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언론 기관 가운데에서는 '아사히 신문'이 대표적인 진보지이며 교토 통신 역시 진보적인 성향을 견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밖에 '역사적 사실을 주시하는 모임' '피스보트' 등 진보 단체 역시 꽤나 많습니다.
하지만 이번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는 이런 좌익들의 입심보다 보수파 우익의 영향력이 더 크게 작용한 듯합니다. 특히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이번 검정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 모임 구성원들 가운데에는 정치가도 있고 학자, 종교인도 있지만 문화 쪽 일에 종사하다 보니 역시 그쪽 인물들에 관심이 쏠립니다.
그 중에서도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활약은 혁혁했다 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아시아 주변국들을 형편없이 얕잡아보는 <전쟁론> 같은 시리즈 만화로 '악명'을 드날린 사람입니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 가운데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인물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언론 기관 가운데에는 '산케이 신문'이 대표적인 우익지입니다. 읽다보면 울화통이 치밀어 오를 정도이지요. 만화를 많이 출판하는 후소샤라는 출판사 역시 우익 중의 우익입니다.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교과서를 출판한 곳도 바로 이곳이지요. 그래서 이제부터 후소샤가 판권을 가지고 있는 만화는 아무리 재미있다 하더라도 보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지금 제게는 이 정도밖에 없다는 게 아쉽고 한심스럽지만 그렇게라도 해볼 생각입니다.
김유준(영화칼럼니스트)6609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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