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대중문화 째려보기]중독된 사랑을 감싸는 푸른 안개

  • 입력 2001년 4월 10일 11시 27분


벚꽃이 만개했습니다. 갓 스물을 넘긴 연인들이 손을 꼭 잡고 하얀 그림자 아래를 지나갑니다.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그들은 지금 그 누구보다도 행복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만인이 축복하는 사랑만이 존재한다면,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 필요가 없겠지요. 의외로 많은 연인이 기쁨은 짧고 고통이나 슬픔은 긴 사랑을 경험한다는군요. 그 중에는 흔히 상식이나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사랑도 있습니다. '사랑은 나이와 국경도 초월한다'고 말하지만, 그 나이와 국경을 넘어 사랑을 이루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지요.

3주 전에 '푸른 안개'의 예고편이 나왔을 때 아내가 말했습니다. "또 유부남과 처녀의 불륜인가요? 왜 꼭 저래야만 하죠?" 과연 유부녀와 총각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습니다. 연상녀-연하남 커플이 많아지면서 이들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가 심심찮게 드라마의 소재로 쓰이기는 하지만, 유부녀와 총각의 사랑은 상식이나 도덕의 이름 아래 미리 걸러지는 것 같네요.

아내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푸른 안개'를 여섯 번 보았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모처럼 감동을 주는 드라마였습니다. 홈페이지(www.kbs.co.kr/drama/fog/index.htm) 게시판에서는 불륜이니 원조교제니 말들이 많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비난 이상의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3주 내내 제 감동의 근원이 무엇일까 고민했더랬습니다. 아직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모호하긴 하지만, 그 감동에 대해 몇 마디 할까 합니다. '푸른 안개'에서 이신우(이요원)와 윤성재(이경영)의 사랑은 우리 시대에 만나기 힘든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해서 육체적인 접촉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둘은 벌써 6회에서 키스까지 했으니까요.

알퐁스 도데의 '별'은 아름다운 사랑을 미성숙한 사랑으로 격하시켰지요. 양치기의 사랑이 아름답긴 하나 그 사랑은 자신의 감정을 끝까지 감추는 짝사랑이었습니다. 모든 짝사랑은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하지 않나요? 그러나 이신우와 윤성재의 사랑은 그런 식으로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서로에게만은 솔직한 사랑이 될 것 같네요.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겠지요. 윤성재는 가장으로서의 책임, 남편으로서의 도리가 가장 큰 문제이겠고, 이신우는 자신보다 꼭 두 배나 나이가 많은 유부남과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의 시선이 부담스럽겠지요. 극본을 쓰는 이금림 선생도 이런 상식적-도덕적 시선을 뛰어넘는 남녀의 사랑을 어떻게 풀어갈까 많은 고민을 하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책임의 문제는 책임의 문제이고 사랑의 문제는 또한 사랑의 문제가 아닐까요? 사랑은 상대에게 중독되는 것이라는 소설 구절이 떠오릅니다. 중독에는 '적당히'가 없겠지요. 파멸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사랑의 진면목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도 적당히, 이별도 적당히 하는 요즈음 세상에서, '푸른 안개'는 중독된 사랑을 그리기 시작했군요. 남녀의 사랑은 벌써 시작되었으니 이젠 그 중독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살피는 것만 남았습니다. 이경영의 무르익은 연기력과 이요원의 당차고 맑은 몸짓이 그 중독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까요?

아내가 뭐라고 하든 저는 '푸른 안개'를 끝까지 보겠습니다. '적당히'로 흐르기 시작한 제 사랑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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