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엽의 이미지로 보는 세상]장진구vs 유택

  • 입력 2001년 4월 10일 19시 09분


장진구. TV 연속극 ‘아줌마’의 남자 주인공. 직업은 대학교수. 잠자는 시간이 일정치 않고 잠자는 장소도 자신의 집 밖일 때가 종종 있다. 상황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쉽게 바꾸며, 관례라는 이유로 남의 논문을 자신의 논문 속에 무단으로 베끼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아내를 아줌마라고 무시하며 세련된 여교수에 대한 사랑을 불태운다. 스스로를 ‘시대의 아픔’을 앓는 ‘절대 고독’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줌마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경멸의 대상이다.

유택. 만화 ‘천재 유교수의 생활’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직업은 대학교수. 밤 9시에 자서 새벽 5시에 일어나며, 길을 건널 때는 횡단보도 이외에는 건너지 않는다. 그는 나이에 따라 자신의 주장이 변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떠들 경우, 떠든 학생을 내쫓거나 아니면 수업을 진행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응한다. 아내를 위해 꽁치도 사오고 빨래도 하고 여행도 간다. 스스로에게 충실하자는 것이 삶의 규율이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자유분방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고리타분한 윈칙론자인 유택 교수가 존경받는다는 사실은 다소 의외다. 그러나 이 의외의 사실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상식적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프로이트나 융의 심리학적 입장에 따르면 어떤 상징이나 이미지 속에는 개인이나 시대의 좌절된 욕망들이 담겨 있다. 현실에서 구현되지 못한 개인이나 시대의 욕망들은 무의식의 창고 속에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가 상징이나 이미지를 통해 분출된다.

예컨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속에는 어릴 적 헤어진 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그리움이 깃들여 있으며, 드라마 ‘왕건’의 인기 속에는 언제인가 다가올 자신의 때를 참고 기다려야 하는 구조 조정시대의 애환이 배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동아일보’의 최근 여론 조사에 따르면 우리 젊은이들의 절반 정도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 모를 때가 많다” “정당한 노력만으로 성공하기 힘들다” “법과 질서를 지키면 손해를 본다”고 대답했다.

이 여론조사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 사회에 대해 깊이 좌절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앞서의 심리학적 입장을 참고해 볼 경우, 원칙론자인 유택 교수의 이미지에 대한 젊은이들의 존경에는 이러한 좌절감이 역설적으로 반영돼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너무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원칙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없다는 현실적 지혜를 일깨우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러나 나사 한 개를 조일 때 준수해야 할 원칙의 파괴가 거대한 다리를 붕괴시키는 참화로 이어질 수 있다. 원칙의 파괴를 시대 탓으로 돌리며 변명하는 ‘장진구’가 아닌, 우직하게 원칙을 지켜나가는 ‘유택’이 그립다.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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