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낭만을 잃은 드라큘라<드라큐라 2000>

  • 입력 2001년 4월 11일 12시 33분


태어나자마자 이미 성인이었고 죽은 자였던 뱀파이어는 1816년 6월 스위스 제네바의 한 빌라에서 처음 탄생했다.

우기에 접어든 어느 여름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무서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낭만파 작가들은 시인 바이런이 상상해낸 뱀파이어 이야기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아직 미완성 괴물이었던 뱀파이어를 현대적인 캐릭터로 완성한 인물은 제네바 빌라에서 함께 환담을 나눴던 바이런의 비서 존 폴리도리.

존이 <뉴 먼슬리 매거진>에 기고한 이야기를 런던 라이시엄 극장의 무대감독이었던 브람 스토커가 소설로 완성해내면서 뱀파이어의 영원한 역사는 비로소 시작됐다. 문학에서 처음 발아했던 뱀파이어가 영화로 스며든 것은 1922년. F.W. 무르나우 감독이 연출한 <노스페라투>부터 패트릭 루시에 감독의 <드라큐라 2000>까지 뱀파이어 영화는 여태껏 총 165편이나 만들어지며 '판타지의 전형'으로 자리잡았다.

<스크림>의 웨스 크레이븐 감독이 제작하고 이 영화의 편집기사 출신인 패트릭 루시에 감독이 연출한 <드라큐라 2000>은 흑백의 고전적인 뱀파이어를 MTV 버전의 현란한 테크놀로지로 부활해낸 영화다. 둔한 움직임과 사나운 이빨을 지닌 <노스페라투>의 뱀파이어는 이 영화에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십자가를 들이대도 아랑곳하지 않는 무신론자에다 산 자보다 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프로페셔널한 자태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

수준 높은 유머 감각과 섹시한 매력을 지닌 그는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본능까지 버리진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사람의 목덜미에서 흘러나오는 신선한 피를 먹고 뱀파이어의 흡혈 본능을 온 인류에 전염시킨다.

21세기 한 건물의 지하실. 골동품상을 운영하는 반 헬싱(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지하실에 100여년 간 갇혀있었던 드라큘라(제라드 버틀러)가 부활하면서 2000년대 미국 땅에 난데없이 뱀파이어 난립 소동이 벌어진다. 값진 보물이 숨겨진 줄 알고 지하실을 털었던 네 명의 전문 강도들이 관 속에 갇혀있던 드라큘라를 부활시켰기 때문. 드라큘라를 불러낸 그들 중 일부는 죽고 일부는 드라큘라로 변해가면서 영화 속 사망자 수와 드라큘라 수는 점점 늘어만 간다.

이렇듯 고전적인 뱀파이어의 부활 이야기에만 초점이 맞춰졌다면 영화는 무척 심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 심심한 뱀파이어 이야기에 매력적인 곁가지 이야기를 벌려놓는다. 자신이 뱀파이어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한 여자(저스틴 와델)와 그 여자를 자신의 영원한 반쪽이라고 믿는 드라큘라의 숙명적인 만남. 반 헬싱의 딸인 그녀는 자신의 몸 속에 흐르는 뱀파이어의 피 때문에 "넌 나의 반쪽이며, 네가 바로 너"라는 뱀파이어의 유혹을 쉽게 물리치지 못한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가 맞물린 <드라큐라 2000>은 그러나 아쉽게도 현란한 수사학에만 그치고 말았다. <매트릭스>에서 보았던 현란한 와이어 액션과 <와호장룡>의 촬영감독 피터 차우가 만들어낸 스펙터클한 화면은 볼만하지만 뱀파이어의 기원을 새롭게 밝혀보겠다는 감독의 다짐은 왠지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왜 드라큘라는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와 성경, 은탄환을 그토록 두려워하는가?" 이런 궁금증에 대해 루시에 감독은 영화 초반 "드라큘라 역시 결국은 기독교적인 구원과 영생을 갈구하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고독하고 슬픈 존재로 그려졌던 드라큘라는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매력을 잃는다. 루시에 감독은 강한 성적 메타포와 반 기독교적 윤리로 치장된 드라큘라의 기원을 숱하게 뒤집더니 결말에 이르면 이 재기 발랄한 농담을 단숨에 그쳐버린다.

중세기사에서 연원을 찾은 2000년대의 드라큘라는 여전히 섹시한 성적 코드로 포장된 '낭만의 대상'일 뿐이며 현대 사회의 욕망, 소외, 중독, 망상을 상징하는 어둠의 대명사다. 그 이상의 새로운 해석은 없다. 2000년대 드라큘라는 1922년의 드라큘라보다 훨씬 세련됐지만, 대신 낭만을 잃었다.

원제 Dracula2000/제작 웨스 크레이븐/감독 패트릭 루시에/주연 제라르 버틀러, 저스틴 와델, 크리스토퍼 플러머, 조니 리 밀러/관람등급 18세 이용가/개봉일 4월21일/러닝타임 105분/홈페이지 http://www.dracula2000.co.kr/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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