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官역사를 지킨다-유교이념의 파수꾼 김일손

  • 입력 2001년 4월 11일 18시 45분


김일손(1464∼1498)은 1486년(성종 17년)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으나, 특별한 주목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1495년 연산군이 즉위하자마자 장문의 상소문을 제출한 것을 계기로 김일손은 조정에서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모두 26조로 된 이 상소문에서 그는 새 왕이 유념해야 할 국가 중대사를 일일이 짚고 있다. 그는 상소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릉(昭陵)의 회복’을 주장했는데, 이는 문종의 왕비이며 단종의 어머니였던 권씨(權氏) 왕후의 지위를 회복하라는 것이었다.

권씨 왕후는 문종의 세자 시절에 단종을 낳고 곧 사망했다. 그리고 문종 사후에는 왕후의 자격으로 모셔졌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가 단종을 죽인 후 그 어머니 권씨 왕후를 격하해 평민으로 만들자, 자연 왕비릉이 철폐됐다. 김일손은 바로 이 문제를 거론해 권씨 왕후의 능(소릉)을 왕비릉으로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상소문에 대한 연산군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지만, 당시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연산군은 부왕인 성종의 장례식과 즉위 후의 복잡한 일들로 인해 김일손의 상소에 별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상소문이 올라간 지 5개월 후인 연산군 원년 10월에 김일손은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에 임명되어 언관으로 진출했다.

언관이 되자 그는 연산군에게 선왕(先王)의 상을 치르는 중이라 하더라도 경연(經筵·임금과 신하가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 나와 신하들과 더불어 국정을 논할 것을 건의했다.

김일손은 이어 “(언관이든 대신이든) 그 하는 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실 때는 말하는 사람의 관직의 높고 낮음을 고려하지 말고 오직 의리에 따라야 한다”고 간곡하게 청했다. 그리고 그 의리는 성리학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므로 왕이 최선을 다해 학문적 소양을 함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일손은 특별히 두 가지 문제에 대해 간언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먼저 성종 사후 장례식의 일환으로 불교식의 수륙재(水陸齋)를 올리는 것이 성리학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왕이 죽으면 수륙재를 지내는 것은 조선왕조 초기부터의 관례였지만, 김일손은 성리학에 기초한 왕조에서 수륙재를 지낸다는 것은 왕이 불교를 신봉하고 성리학을 져버리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연산군 즉위 초 이 문제는 관례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로들의 반대를 샀으며, 이로 인해 심각한 논쟁이 일어났다. 결국 연산군은 “앞선 왕들이 하던 일을 함부로 고쳐서는 안된다”며 김일손의 주장을 반대했다.

아직 수륙재 문제에 대한 논란이 가시지 않았던 연산군 원년 12월말에 김일손은 소릉의 회복을 다시 주장했다.

문종이 죽은 다음 부인도 없이 종묘에 모셔진 것이 의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이 소릉 회복 문제는 바로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당시의 역사를 제대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곧 바로 이 문제가 부각되지는 않았으며 그로부터 몇 년이 경과한 뒤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게 된다.

연산군 4년(1498년) 7월, 소릉 회복을 청한 것은 국가의 기본을 문란하게 한다는 죄목으로 김일손은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됐다.

당시 조정에는 윤필상 이극돈 등 세조의 집권을 지지했던 원로들이 남아 있었는데 만약 김일손의 상소를 받아들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역사적으로 단죄하게 되면, 해당 원로들이 충신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즉위 후 몇 년간 왕으로서 방향을 잡지 못하던 연산군은 마침내 세조와 같은 전제적 왕권을 추구하기로 마음먹었으며 이에 따라 연산군은 세조에 대한 비판을 곧 자신의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김일손을 엄하게 추궁하기로 작정하고, 왕 자신이 직접 나서 그 배후를 캐려 했다. 그러나 김일손은 “이 같이 중요한 문제를 어찌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겠습니까? 저는 이미 할 말을 다 했으니, 혼자 죽으려 합니다”라고 대꾸할 뿐이었다.

김일손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후 정몽주의 사당을 세워 그의 절개를 높였으며, 심지어는 고려왕실의 제사도 끊어지지 않도록 배려했음을 지적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조에 의해 난신으로 몰려 죽은 김종서나 황보인 같은 사람들의 절개를 기려야 하며, 마땅히 소릉도 복구해야 나라의 중심이 서는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 사태는 끝내 무오사화라는 대규모의 숙청으로 발전해, 김일손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김일손은 언관으로서 성리학의 가르침이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함을 역설함으로써 유교 이념의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직무를 다하다 죽겠다”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 연산군이 축출되고, 그를 도와 사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단죄됐다. 다시 10여년이 더 지나 김일손의 주장대로 소릉도 복위됐다. 죄인으로 죽은 김일손은 20여년 만에 의인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정두희(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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