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복원해낸 70년대와 80년대의 풍물, ‘친구’가 강조하는 의리나 충성 등은 수직적 복종과 인간적 아량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세상이다.
그것은 인권이나 사회복지같은 합리적 사고에 의해 인간이 존중되는 것과는 또 다른 식의 가치체계라고 볼 수 있다. 좀 덜 세련되고 좀 덜 합리적이지만 명예퇴직이니 IMF니 외국계 자본이니 하는 말이 없던 시절 말이다.
경제적 합리성과 구조조정이 의리와 정을 몰아낸 자리, ‘친구’가 신드롬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 우리가 처한 이같은 상황 때문일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것은 경상도 출신 대통령들 밑에서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던 깡패영화 일색이더니, 이번에는 억센 부산 사투리를 쓰는 깡패영화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친구’는 ‘초록 물고기’나 ‘넘버 3’같은 영화와 달리 사회비판적 색채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관객들에게 지금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깨닫게 하고, 그것을 뼈속 깊숙이 그리워하게 만드는 최면을 건다.
그렇다면 ‘친구’의 복고주의에 왜 20대들마저 열광하는 걸까? 대학생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들 역시 준석과 동수처럼 선생님에게 체벌을 당하고 그들 내부에서조차 대학갈 놈과 못 갈 놈을 구분하며, 나이가 들면서 살벌하게 변해버린 동년배의 모습을 피부로 경험했다는 것이다.
중산층이며 모범생인 상택이 가출하자 깡패인 준석은 씩 웃으며 말한다. “니는 니처럼 살아라. 내는 내처럼 살께.” 친구가 전 대한민국 관객들의 공감대를 건드리는 것은 우정과 의리의 포장에 쌓여있어도 엄연한 게임의 법칙이다.
그렇게 살벌한 사회적 경계와 생존 규칙이 이미 고등학교때부터 존재한다는 사실. 유년은 멀찌감치 가버렸고 어린 시절의 우정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의 이해관계가 엄연하다는 사실.
조만간 그 정글로 발을 디뎌야 할 20대들은 동수와 준석의 칼부림에서, 한 때의 친구가 적이 되어버린 통렬한 비장감과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본질적으로 폭력에 의존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냉철하게 보자면 ‘친구’는 결코 잘 만든 영화는 아니다. 편집은 튀고 이야기는 건너뛴다. 그러나 이전 깡패영화와 달리 ‘친구’의 정서적 흡인력은 매운 고추장의 맛처럼 친숙하면서도 강렬하다. 리얼한 액션은 한 무더기의 욕과 어우러져, 입안이 얼얼해도 호된 ‘맛’을 잊지 못하게 한다.
무엇보다 ‘친구’는 한국 사람들에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진다. 영웅없는 시대에 그래도 당당하게 의리 지키며 살려던 놈들은 누구였냐고.
이 질문에 가방 끈 긴 놈들은 운동권이라고 어깨를 펴겠지만 그들이 정치판에서 입신양명하는 2001년, 여전히 이 땅을 온 몸으로 박박 기었던 것은 부산 자갈치시장 모퉁이에서 만난 마디 굵은 손의 ‘싸나이’들이라고, 대학 문턱 한 번 안가본 그들이라고 ‘친구’는 대답해 주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겸 임상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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