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은 이미 잊혀진 과거의 정당이다. 그러나 한때 민주당은 마치 천형(天刑)처럼 한국정치를 옥죄는 지역할거주의와 보스정치를 혁파하고 이념과 정책 중심의 새 정치를 펼쳐보려고 애쓴 개혁정당이었다. 스타군단이라고 불릴 만큼 화려하고 참신한 개혁정치가들이 주도했고 적지 않은 시민사회 일꾼과 지식인들도 참여했다. 뭔가 한국정치에 새 지평이 열릴 듯한 긴박감이 감돌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정치의 벽은 높고 차가웠다. 결과는 원내교섭단체 구성에도 못미치는 참담한 몰락이었다. 민주당은 그후 공중분해됐다. 그 때 주역들은 정치적 생존을 위해 여야로 흩어져 구태의연한 정치질서에 순응하며 명맥을 유지하거나 정계를 떠났다. 아직 1996년 춘사(椿事)가 뇌리에 생생한데 누가 그 선거제도와 정치문화 아래서 무모하게 새로운 개혁정당의 출범을 준비할 것인가.
많은 이가 우리나라에는 정당은 있지만 정당정치는 없다고 말한다. 정당마다 정제된 이념을 표방하고 정책쟁점을 중심으로 정치적 경합이 이뤄질 때, 정당은 정치의 중심이 되며 정책을 통해 민생과 뜨겁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정치에서 정당은 권력정치의 도구일 뿐이며, 동전의 양면인 인물과 지역으로 엮어지는 연고주의 네트워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정당개혁, 나아가 정치개혁의 요체는 무엇인가.
최근 정계의 최대 관심은 내년 대선인 듯하다. 따라서 이른바 대권주자들은 정부통령 4년 중임제 같은 권력구조 개편 위주의 개헌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정치개혁 차원보다 당리당략 내지 선거전략 차원에서 논의되는 양상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진정 정치발전을 원한다면, 개헌보다는 비례대표제에 입각한 선거법 개정을 통해 통합민주당과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는 주로 소선거구제를 중심으로 운영돼 왔다. 그런데 이 제도는 막대한 사표(死票)를 만들어 왜곡효과를 증폭시키는 문제를 안고 있다. 통합민주당이 득표수 230만표, 유효득표의 11.2%를 얻고도 지역구 9석(3.6%)밖에 얻지 못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소선거구제는 1위 득표자만 국회에 진출시키기 때문에 확고한 지역적 지지기반을 가진 거대정당 소속 후보가 아니면 지역구 1위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지역주의가 풍미하는 소선거구제에서 개혁성향의 이념정당과 정책정당의 국회 진출은 무망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선거비용이 든다. 따라서 뜻과 능력은 있어도 돈이 없는 이들의 정치진입은 실질적으로 봉쇄된다.
이에 비해 비례대표제는 인물이 아닌 이념 및 정책지향의 인물들이 뭉친 집단에 대한 선거다. 득표비율에 따라 의석이 나눠지므로 대표성이 높다. 따라서 사표문제가 사라져 신생개혁정당의 제도권 진입을 촉진시켜, 지역당 구조를 뛰어넘는 전향적인 정치구도를 제도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통합민주당이 비례대표제에서 선거를 치렀다면 30명이 넘는 당당한 정치세력을 국회에 진출시킬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비례대표제는 정당체제를 이념 및 정책중심 정당으로 전이시켜 지역주의와 금권정치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정치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 가장 실효성 있는 제도이다.
비례대표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당내 민주주의가 성숙되고 정책정당을 지향하는 정치엘리트의 결의가 투철해야 한다. 우리 정당정치의 성숙도를 감안할 때, 현 단계에서는 후보가 지역과 비례에 동시 출마할 수 있는 독일식 ‘인물선거를 가미한 비례대표제’가 가능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국회의원 선거법은 대체로 선거 직전에 시간에 쫓기면서 개정돼 왔다. 그것도 집권세력의 위세를 바탕으로 강행됐거나, 여야간 정치적 담합으로 이뤄진 게 사실이다. 오늘의 시점은 얼마간 여유를 갖고 학계 정치계 언론계 및 시민사회가 보다 본질적 차원에서 정치개혁 논의를 하기에 적당한 때가 아닌가 한다.
안병영(연세대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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