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의 80%가 욕인 <파이란>의 '양아치' 강재처럼, 그는 말을 고르지 않았다. 인터뷰용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의 대답엔 강재의 어투가 그대로 묻어 있다. 담배를 깊숙이 빨아올리며 "난 가운데 자리는 싫은데"라고 말하던 그는 어느새 가운데 자리로 옮겨 앉고 있다. "배우 짓 해먹기도 힘들다"는 표정. 그러나 최민식의 그런 표정 안엔 예의를 '벗어난 것'이 아닌 예의를 '벗어 던진' 사람의 그것이 묻어있어 정겹다.
연애소설에 취해있던 <해피엔드>의 소심한 남자 이후 그는 홍콩 스타 장백지와 함께 하는 영화 <파이란>과 만났다. 양아치 바닥의 생리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3류 건달 이강재. 보스가 되기엔 너무 소심하고 유능한 조직원이 되기엔 일을 끝까지 밀어붙일 심지가 모자란 그는 어쨌거나 철저히 버려진 인간이다. 그런 그에게 장백지가 연기하는 '파이란'은 어두운 삶을 표백시켜주는 '인간 세탁기'나 다름없다.
"중국에서 밀입국한 여자인데 저와는 위장 결혼한 사이입니다. 제가 몰고 가는 영화의 축이 있고 파이란이 몰고 가는 영화의 축이 있죠. 저는 무지막지하게 '어두운 놈'인데 파이란의 하얀 부분이 그걸 보완해줍니다."
자신을 무지막지하게 어두운 놈으로, 파이란을 순결한 천사로 비유하긴 했지만 두 사람은 결국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희망 없는 출구 앞에서, 두 사람은 너무도 다르게 행동한다. 파이란은 사람들의 '진심 없는' 친절에도 항상 감격해하고 강재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세상의 밑바닥을 뒹군다.
그런 그에게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가짜 아내' 파이란은 편지를 부쳐온다. "제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친절합니다. 그 중에서도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왜냐하면...저와 결혼해 주셨으니까요"라고.
두 사람은 영화 속에서 단 한 차례 스치듯 만날 뿐 한 프레임에 잡히는 법이 거의 없다. 당연히 두 사람은 실제로도 만난 적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장백지를 친숙하게 '그 친구'라고 불렀다.
"그 친구가 주로 촬영하는 대진 해수욕장엔 일부러 가지 않았습니다. 실물을 보면 내 감정선이 깨질 것 같아서요. 섭섭하다고, 어째서 내 촬영장엔 한 번도 오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리더군요."
그런 투정을 듣고도 그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그게 최민식의 연기하는 방법이다. 시간이 흐르자 장백지도 자연스레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비록 현장에서 많이 마주칠 기회는 없었지만, 그는 장백지를 어린 동생 돌보듯 아꼈다.
"겨울 촬영이 많아 고생 많이 했습니다. 특히 그 친구는 감기 몸살에 걸려 오바이트까지 하며 연기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다음 영화도 같이 할까 했더니 단번에 겨울 말고 여름이나 봄에 찍자고 그러더군요."
오래 사귄 애인과 이별하는 마음으로 <파이란>을 바라보고 있는 최민식은 이제 화가로 변신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조선시대 화가 '장승업'. 신작 <오원 장승업>을 준비중이던 임권택 감독은 그를 "연기 잘 한다"는 이유로 캐스팅했다. 왜 갑자기 시대물을 택했을까 궁금했는데, 그는 참 의외의 대답을 한다.
"이젠 제 연기에도 '건강진단'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 앞에 있으면 연기자로서 오만 방자해지는 마음도 다잡을 수 있을 것 같고...그래서 이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심했죠. 지금 전 그분들 앞에서 맞담배도 못 피웁니다. 얼굴색만 보고도 제 연기의 맥을 파악해주니까, 한의사 앞에 앉아있는 것마냥 어려워요. 시대물이고, 대 화가의 삶이기 때문에 장승업과 저 사이엔 아직 괴리감이 많습니다. 앞으로 6개월간은 그 괴리감을 좁혀나가는 작업을 해야겠죠."
자신의 오만 방자함을 다스리겠다며 스스로 '대가' 앞에 무릎 꿇은 그는 몇 달 뒤 <파이란>의 강재를 모두 없애고 화가 '장승업'으로만 남게 될 것같다. 생각해보니 술 좋아하고 걸쭉한 입담이 매력적인 최민식은 '술고래 화가' 장승업과 참 잘 어울리겠다, 싶다.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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