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시절에나 있음직한 일들이 마치 흑백사진을 다시 보듯 펼쳐진다. 대우차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 폭력진압 비디오는 79년 YH사건, 80년 5월 광주의 필름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남산'은 없어졌다지만▼
1970년대 산업화과정에서 소외된 빈민들의 삶을 그린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조세희 작)이 그 시절의 베스트셀러였다면, IMF시대 서민들의 고달픈 삶을 그린 소설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이만교 작)는 오늘의 베스트셀러다.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는 혈기왕성한 젊은이만도 100만명이 넘는 사회, IMF라는 고난의 터널을 거치면서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된 사회, 내 자식을 내 나라에서 공부시킬 수 없다며 외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사회, 이런 사회에 희망 대신 실망만 키워주는 정치는 그 시절이나 오늘이나 형태는 다를지 몰라도 실상은 마찬가지 아닌가.
검은 선글라스를 쓴 기관원들이 바른 말하는 언론인을 끌어다가 고문하던 그 시절의 ‘남산’과 ‘서빙고’는 지금 없다. 대신 ‘합법적’인 계좌추적과 세무조사 신문고시로 기자들의 뒤를 캐고 언론사를 옥죄는, 거기에 맞춰 북 치고 나팔 부는 세력까지 동원한 ‘언론개혁’이 있을 뿐이다.
그동안 정권도 여러 번 바뀌어 ‘국민의 정부’에 이르렀지만 핵심인물은 그때 그 사람들이다. 쿠데타―유신―군사정권 시절 활약했던 사람들이 공동여권의 대표가 되어 무슨 ‘연합’을 한다며 손을 잡았다. 이들이 국정을 논의하고 나라를 이끌겠다고 나섰다. 개혁 대상이 될 사람들을 지도자로 내세워 개혁을 하겠다니 그 개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더욱 가관인 것은 ‘연합’의 지도자라는 그 시절의 정치인들 중에는 스스로 ‘킹메이커’라며 나서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무슨 권한으로 ‘킹메이커’노릇을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설령 그 역할을 한다고 치자.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킹’이 21세기 이 나라를 이끌어간다면 이 나라는 도대체 어디로 갈지 걱정이다.
▼권위주의 리더십의 한계▼
50년 만에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민주정권에서 정치가 제대로 풀리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한 대답의 한 실마리를 최근 오랜만에 입을 연 전직 국무총리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영삼(金泳三·YS) 김대중(金大中·DJ) 두 대통령은 천신만고의 민주화 투쟁 끝에 대통령이 됐지만 정치권의 병폐는 여전하다. 결국 두 대통령의 민주주의가 정권획득을 위한 구호의 정도를 넘지 못했고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경륜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평생을 민주화 투쟁에 몸바쳐왔다고 자부하는 두 분께서는, 특히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김대통령으로서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80년 봄, 그리고 87년 대선(大選)때 양 김(金)씨가 집권 욕심 때문에 민주화 역량을 결집하지 못하고 분열상을 보여 그만큼 민주화를 지체시킨 책임은 면하기 어렵다. 또 YS의 3당 합당이나 이번 DJ의 3당연합으로 자신들이 반민주 반개혁세력이라고 비난하던 구정치인과 연대한 것은 한마디로 민주화의 큰 흐름을 거스르는 정략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화 투쟁 경력은 대단하지만 스스로의 정치행태는 매우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인, 민주주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리더십의 소유자들이 두 김씨다. 그러니까 그들이 내세우는 개혁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정당 민주화나 정치개혁이 말뿐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김대통령이 이제라도 겸허한 자기반성 위에서 비판자들과의 진솔한 대화와 토론, 타협과 양보의 정신에 터 잡은 민주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으면 오늘의 난국은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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