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전쟁을 일으키고 마침내 그 전쟁에 져서 헌법을 바꾸고, 군대도 없앤 것이 일본이다. 그것이 반세기 전 역사다. 그런데 이제 일본은 뒤집으려 한다. ‘침략과 식민지배는 자존자위(自存自衛)를 위해 불가피했다’ ‘일본이 저지른 죄는 딱 한가지 전쟁에 진 것뿐이다’고 억지를 쓴다. 반성할 것도 사죄할 것도 없다고 우긴다. 새 총리는 집단적 자위권도 행사(군대동원)도 할 수 있다고, 전범추모(야스쿠니신사 참배)도 내놓고 할 것이라고 공언한다.
맥아더 점령군 이래의 ‘뒤틀리고 잘못된’ 역사를 고쳐 쓰자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것이 새삼 각광(?)을 받는다. ‘역사 교과서 왜곡’을 주도한 문제의 그 모임이다. 그러면 그 모임은 역사학자들이 주축일까. 그렇지 않다. 그 또한 이상한 일이다.
▼문학도 평론가가 우경화 앞장▼
일본 지식인 사회의 ‘우경화’ 선봉은 문학도와 평론가다. 물론 다양한 전공 직업분야에서 우익에 몸담고는 있다. 하지만 두각을 나타내는 선봉장들은 문학을 배우고 탐미적 정서와 주관적 해석의 직업 틀 위에서 자라고 성공한 인사들임을 나는 주목한다.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의 선두에 선 니시오 간지(西尾幹二)는 도쿄대 독문과를 나온 독문학자. 그가 쓴 ‘국민의 역사’라는 일본 예찬론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일본의 시각에서 역사를 고쳐 쓰자는 소위 자유주의 사관의 주창자 후지오카 노부카즈(藤岡信勝)는 홋카이도대학의 교육학과를 나온 교육학 교수다. 역사학으로 잔뼈가 굵은 학자가 아니다. 그는 일본이 ‘자학(自虐)사관’ ‘사죄의 역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친다. 마치 ‘자찬(自讚)의 사관’이 아니어서 요즘 일본이 정체에 빠져 있다는 식이다. 군위안부를 교과서에 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 아마추어 사학자의 지론이었다.
일제 군국시대에 죽은 일본인 300만명을 슬퍼할지언정 그 때 일본 때문에 죽은 아시아의 2000만명을 무슨 수로 애도할 수 있느냐고 외친 이가 있다. 그 가토 노리히로(加藤典洋)는 도쿄대 문학부를 나온 문예 평론가다.
상습적인 극우 발언으로 서민의 표를 모아온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郎)는 바로 ‘태양의 계절’이라는 소설로 스타덤에 오른 작가 출신이다. 그 밖에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은 유색인종이 백인을 이긴 최초의 승전”이라고 자찬하는 와타나베 쇼이치(渡部昇一)는 런던에 유학했던 영어학자다.
정통의 역사학자 철학자 국제정치학자가 다 어디 가고 선두에 서지 않는 것일까. 왜 하필 사실 기록 증거, 그리고 객관적 평가가 몸에 밴 일본을 대표할만한 사학자가 아니라 문학도 같은 섬세한 감성의 선동가들이 일방적인 자료와 해석, 검증 확인되지 않은 가설을 역사교과서에 쓰라고 외치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유대계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날카로운 분석을 떠올린다. 그녀는 독일 나치즘을 연구한 명저 ‘전체주의의 기원’ 등에서 말했다. 나치 태동기에 북을 치고 폭도를 모은 것은 바로 페이소스에 호소하는 문학도 들어 있다고. 문학본류에도 끼지 못한 그 이단의 쓰레기 지식인들이 나치의 깃발을 치켜들었다고. 우익 깃발을 치켜들고 이름을 날리는 우익 명사들은 펄쩍 뛸 것이다. 독일 나치를 부른 광신적 문학도들과 비교할 것이냐고. 나도 제발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느낌은 불길하기 짝이 없다.
아시아와 세계를 쳐다보고 인류와 문화를 말하는 목소리가 일본에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교수들과 시민단체의 가냘픈 목소리, 외로운 절규는 따돌림당하고 일본 대중의 귀에서 멀어지고 있다. ‘우향우’를 선구(先驅)하는 나팔소리와 ‘신의 나라’ 찬가만이 열도에 울려 퍼진다.
‘일본이 만일 (상호존중의) 인륜을 짓밟는다면 세계는 일본의 적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망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겠는가’‘일본인은 스스로에 유리한 도덕을 내세워 일본을 정당화하는 비겁한 태도를 부끄러워 해야 한다’. 벌써 80년도 넘게 흘러간 지난 시절,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그렇게 외쳤다. 그런 목소리는 짓밟혔고 일본은 패망했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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