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주체성 빼앗는 자본주의-세계화 비판
프랑스적 가치 '자유-평등-박애'회복 역설
합리적인 미치광이
자크 아탈리 지음 이세욱 옮김
252쪽 8000원 중앙M&B
유토피아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한 애착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때론 종교적인 측면에서, 때론 정치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의 희구는 계속돼 왔다. 일상을 통해 부서지고 깨어지고 좌절돼도, 죽음을 건너뛰고 세대를 이어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왜 그토록 갈망했던 것일까?
경제학 박사이며 프랑스 미테랑 정권의 경제고문이기도 했던 자크 아탈리(58·플라네트 파이낸스 총재)는 이 같은 인간의 원초적이고 집단적인 열정의 본질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이 책에서 그는 다양한 유토피아들을 분류하고 이에 대해 과감하리 만큼 냉소적 비판을 가한다.
동양의 탈 현실적 가치관에 대해서는 반 유토피아적 경향의 문화로 규정하며, 유토피아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던 동양문화의 과거 수동적 태도에 대해 잇따라 질타를 가한다. 그 수동성으로 인해 오늘날 동양문화의 현실은 서구문화를 받아들이고 또한 서구적 유토피아 논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패배자의 위치에 놓이게 됐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그는 오늘날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볼 수 있는 타인에 대한 불신과 과도한 경쟁 및 상호 배타의 모습들을 인간의 불안으로 규정하면서, 동시에 이를 새로운 유토피아 출현의 가능태라고 해석한다.
한 문명이 죽어가고 있다는 느낌과 안개 속에서 다른 문명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느낌이 사람들 사이에 분명하게 자리잡을 때 유토피아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화와 같은 자본주의의 승리가 인간을 그 주체성으로부터 격리시켰고, 따라서 이제는 그에 저항하는 새로운 유토피아의 꿈을 현실화할 때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오늘날 새로운 유토피아의 출현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형제애 사이의 조화에 의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하게 역설한다.
이타주의, 책임감, 연민, 자비, 사랑, 관용 등으로 무장한 형제애를 바탕으로 서로의 자유와 평등을 지켜주는 전 인류적 박애 정신이야말로 과학 발전과 시장경제의 극대화로 점차 상실돼 가고 있는 인간 본연의 권리를 되찾아 새로운 유토피아를 열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해 갖는 보편적 이타주의(형제애)야말로 타인의 행복을 증대시킴으로써 자신의 행복도 증대시킬 수 있는 절대 미덕이자 윤리적 가치관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새로운 유토피아의 달성을 위해 형제애에 대한 의무의 규정화, 세계정부의 구성 및 단일 경찰제도와 사법제도, 경제기구 등의 확립과 같은 범세계적인 차원에서의 제도적 뒷받침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때 특히 자유와 평등에 대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프랑스의 역할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합리적인 미치광이’. 자신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합리적 사고를 지닌 주체로서,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마치 광인의 무모함처럼 달려드는 이타적 개인으로서의 미치광이. 아마도 아탈리는 그의 저서에서 이런 무모함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했으리라.
형제애라고 하는 미시적 관점과 세계적 단일 제도라고 하는 거시적 관점의 부조화를 통해, 각박해져 있는 현실적 인간들에게 환상일 수밖에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일말의 역설적 희망의 꿈을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또는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처럼 유토피아의 현실은 타자를 위해 던져진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발현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탈리는 과연 그의 유토피아가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나’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최원기(한국청소년개발원 책임연구원·프랑스 소르본느대 사회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