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지도자의 고별사

  • 입력 2001년 5월 4일 18시 29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책이라는 성경 가운데 사무엘의 고별사는 아무리 보아도 인상적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왕에게 지도자 자리를 물려주고 떠나는 공개석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은 적이 있느냐. 내가 누구의 나귀를 빼앗은 적이 있느냐. 내가 누구를 속인 일이 있느냐. 내가 누구를 억압한 일이 있느냐. 내가 누구한테서 뇌물을 받고 눈감아준 일이 있느냐. 그런 일이 있다면 나를 고발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갚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이 지도자로 있는 동안 그런 사실이 전혀 없음을 일제히 소리쳐 확인하며 그를 보낸다.

역사적으로 당시의 분위기가 그렇게 여유 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 장면만 놓고 얘기한다면 어쨌거나 지도자가 얼마나 아름답게 퇴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나라빚 누가 떠안게 되나▼

크고 작은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우리네 지도자들 가운데 이처럼 재임중의 공과를 자신 있게 묻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물러난 대통령들마다 뒷자리가 편치 않았던 것도 사실은 이런 과정을 거칠 수 없을 만큼 재임기간이 당당하지 못했던 때문은 아닐까.

정권의 임기가 아직도 1년반이나 더 남았는데 느닷없이 ‘차기정권에 국가부담 떠넘기기’ 논쟁이 불붙었다. 물론 싸움을 건 쪽은 야당인 한나라당이다. 잠재적 채무까지 합하면 국가의 빚이 작년 말 현재 638조원에 달할 만큼 이 정권 들어 빚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결국 그 해결의 부담이 다음 정권으로 떠넘겨지게 됐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16개 항목에 걸쳐 조목조목 수치까지 제시해 가며 집권당을 공격하자 기획예산처 같은 정부조직까지 나서 여당에 대한 엄호사격에 들어갔지만 이미 분위기는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이성적 궤도를 저만큼 벗어난 느낌이다.

관심을 끄는 것은 공격의 내용보다 논쟁을 둘러싼 여야 양측의 대조적인 모습이다.

한나라당은 흡사 다음 정권을 이미 손아귀에 다 잡은 사람들처럼 여당에 투정을 하고 있다. “살림을 그렇게 헤프게 해서 정권을 넘겨주면 우리가 아무리 재주가 좋은들 어떻게 경제를 꾸려가란 말이냐” 하는 투다.

현정부와 집권여당을 공격하기 위한 정쟁적 성격이 강하지만 진짜 정권을 이어받았을 때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 것도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혹 한나라당이 차기정권을 맡은 후 빚어질 실정의 책임을 현정부에 미리 떠넘겨 놓고 보자는 뜻이라면 이건 타임머신의 모순을 연출하는, 대단히 복잡한 정치적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여당인 민주당의 자세다.

“차기정권에 짐이 된다니, 별 걱정 다해주네. 우리가 얹은 그 짐을 우리가 다시 떠맡아 갈 건데 다음 정권에서도 구경꾼이 될 한나라당, 당신네들이 무슨 상관이냐” 하는 여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흡사 다음 정권을 이미 한나라당에 넘겨준 사람들처럼 그저 말대꾸나 하듯 스스로 위축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인가. 한나라당 주장에 찔리는 부분이 많아서인가.

“과거 30년간 정경유착과 관치경제로 부실을 초래한 한나라당이 국가채무 급증요인에서 피할 수 없는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민주당의 반응이 바로 그런 부분이다. 한나라당이 국가채무 발생에 원죄를 갖고 있으니 다음 정권에 떠넘겨질 막대한 채무도 한나라당이 집권해서 잘 해결해 보라는 뜻인가. 민주당이 상당히 겸손해졌다는 느낌을 주는 대목이다.

▼떠날때 당당할 수 있으려면▼

국민 대다수가 투표는 물론 아직 마음도 정하지 않았는데 여야간에 자기들끼리 차기정권 부담운운 하는 모습이 아직은 생경해 보인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국가부채 문제만큼은 언젠가 반드시 검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정부가 빚을 지더라도 상응한 결실이 있었다면 채무의 불가피성은 인정될 수 있다. 반대로 재임중에 나라빚만 잔뜩 부풀려 놓고 손 댄 정책마다 하나같이 속은 썩고 겉만 꾸며져 있다면 국민은 반드시 선거를 통해서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때 퇴역할 우리의 지도자가 고별사에서 “내가 인기주의에 몰입해 헛된 돈을 쓰느라 나라빚을 늘렸느냐, 그렇다면 나를 고발하라”고 말한다면 국민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지금부터 벌써 궁금해진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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