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불신과 증오' 인간역사의 오류

  • 입력 2001년 5월 4일 19시 08분


◇파라다이스

1993년 아프리카 계 미국작가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70)은 흑인과 여성이라는 이중고를 짊어지고 태어난 미국 흑인여성들의 문제를 천착해온 재능 있는 작가다.

모리슨의 신작소설 ‘파라다이스’ 역시 “그들은 가장 먼저 백인소녀를 쏜다”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히 인종문제나 성차별을 다룬 소설이 아니다. 비록 흑인들의 역사와 흑백간의 갈등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인종과 성을 초월해 인류 모두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파라다이스’는 ‘루비’라는 흑인마을의 남자들이 근처의 수녀원을 습격하는 잔혹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다음, 이 소설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가를 추적하며, 그 과정에서 그동안 인류 역사가 저질러온 잘못이 과연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점검하며 성찰한다.

19세기 후반, 9명의 가부장적 남자들이 이끄는 미시시피주와 루이지애나주의 해방노예들은 서부로 이동하다가 오클라호마주의 한 마을에 정착하려하지만, 피부색이 좀 더 연한 흑인들에 의해 거부당한다. 좌절과 증오 속에 그 곳을 떠난 그들은 헤이븐이라는 자신들만의 마을을 건설하고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헤이븐이 피폐해지자, 흑인들은 다시 거기를 떠나 인구 360명의 ‘루비’라는 마을을 세운다.

범죄가 없고 자급자족하는 ‘루비’는 일견 파라다이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곳은 이방인을 반기지 않고, 그래서 여행자를 위한 편의시설이 전혀 없는 배타적인 마을이다. 반경 90마일 내에는 아무 것도 없고 고립된 그 마을 주변에는, 오직 남성의 폭력에 의해 정신적으로 상처 입은 여자들이 살고 있는 수녀원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1960년대가 되고 진보주의 바람이 불어오자, ‘루비’의 교조주의적 남자들은 마을의 도덕적 오염과 붕괴를 수녀원 탓으로 돌리고 드디어 그 곳을 습격한다. 낙원은 악몽으로 변한다. ‘루비’와 수녀원은 교류를 거부하고 닫힌 체계 속에 칩거하며, 타자를 불신하고 증오해온 인간 역사의 오류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고도의 상징적 장치들이다.

작가는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고립되면 생명력이 사라집니다. 고립되면 미래가 사라집니다”라고 말한다.

문학의 위기설과 효용론 시비가 도처에서 들려오고 있는 요즘, 모리슨은 이 작품을 통해 문학이란 바로 인류 역사의 잘못을 깨우쳐주고, 인간의 삶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리슨은 자신을 흑인작가나 여성작가로만 보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비록 흑인여성들을 소재로 사용할지라도, 자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보편적인 작가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인작가 포크너의 후계자로 불리는 모리슨은 흑인이 아닌 백인 독자들을 상대로 세련된 소설을 쓴다. 자신이 ‘흑인작가’가 아니라 그냥 ‘작가’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모든 소수인종 작가들의 꿈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하고 또 필요한 것일까. 오히려 흑인작가이자 여성작가였기에 오늘의 토니 모리슨이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모리슨이 원하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낙원’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그러한 유토피아는 없다. ‘파라다이스’는 인간의 정체성 논의를 통해 바로 그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김선형 옮김, 원제 ‘Paradise’(1998년).

토니 모리슨 장편소설, 503쪽 1만3000원 들녘

김성곤(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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