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반도체(구 현대전자) 지원 방안을 놓고 이리저리 궁리를 하던 채권 은행단이 느닷없이 ‘투신권의 손실분담’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채권단은 3일 “하이닉스가 올 하반기 신규발행하는 회사채 가운데 7600억원어치를 투신권에서 인수하라”고 주장했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투신권의 동참이 있어야한다는 것.
투신권은 즉각 반발했다. 다만 서울보증보험의 보증을 전제로 2400억원어치는 사줄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양측의 공방을 바라보는 많은 독자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금액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누구의 주장이 타당한지….
처음부터 따져보자. 은행권이 7600억원을 주장하고 나선 배경은 이렇다. 올 하반기 만기가 돌아와 은행권이 갚아야하는 하이닉스 회사채 중 1조5000억원을 투신권이 보유하고 있다. 투신사들이 채권을 행사하면 1조5000억원을 갚아줄테니 그 돈으로 신규 발행하는 회사채를 인수하라는 것. “당신들은 원금을 고스란히 챙겨가니까 그 가운데 절반이라도 다시 투자해주는게 도리가 아니냐”는 논리.
투신권은 “말도 안된다”는 반응이었다. 한 투신사 임원의 반론.
“은행은 자기자금으로 회사채를 사지만 투신사는 고객이 펀드에 맡긴 돈으로 사야한다. 투기등급 채권을 펀드에 편입시키는 것을 어느 고객이 반기겠느냐.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제2의 대우채 환매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같은 주장을 바탕으로 투신권은 1조5000억원 가운데 서울보증보험의 보증채를 제외한 1조2000억원 중 20%인 2400억원 정도는 고려해볼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말을 넘기면서 공방은 “그러면 6000억원은 보증으로 1600억원은 무보증으로 해주겠다” “1600억원은 무리다”는 식으로 전개돼왔다. ‘대승적인 차원’이니 ‘고객 의견 존중’이니 하는 양측의 근본적인 주장은 사라지고 ‘가격 협상’으로 탈바꿈해버린 것이다.
이들의 힘겨루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이 빠져있다. 누가 얼마만큼을 인수하건 결국 인수 대금은 은행과 투신사 고객들의 돈이라는 사실. 전주(錢主)는 뒷전에 밀려있고 ‘남의 돈’으로 “더 내라” “못낸다”며 밀고당기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전주들의 생각은 어떨까. 하이닉스라는 회사의 채권 인수를 달가워할까. ‘대승적인 차원’도 중요하지만 개인 투자자들의 입장에선 자기 주머니 사정이 더 급하기 마련이다.
또 하나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은행권과 투신권의 합의가 이뤄져서 지원 방안이 결정되면 이 회사가 정상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면 고객들로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고객들은 친절한 설명을 원하고 있다.
gold@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