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당신의 명분

  • 입력 2001년 5월 7일 18시 44분


얼마 전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를 만났을 때 필자가 제기한 의제는 이런 것이었다.

‘이 총재의 브랜드는 보수와 영남인가. 이 총재가 다음 대권을 잡는다고 가정하자. 그랬을 때 진보와 호남을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그에 대한 비전과 대안이 미흡하다면 이 총재가 차기 대통령이 되어야 할 이유와 명분은 무엇인가.’

같은 의제를 집권측에 던져보자.

‘당신들의 브랜드는 진보와 호남인가, 아니면 진보+보수 중탕에 권력 나누기식 지역연합인가. 당신들이 재집권한다고 가정하자. 그랬을 때 영남과 보수(또는 진보)를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그에 대한 비전과 대안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당신들이 재집권해야 할 이유와 명분은 무엇인가.’

물론 이런 식의 단선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로 현실정치와 복잡한 세상의 이해관계를 명쾌하게 풀어낼 수는 없다. 다만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의제’라는 점을 독자께서는 양해하기 바란다.

▼실속 없는 '강한 여당'▼

아무튼 집권측이든, 야당측이든 이 의제에 대한 답을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는 없다. 당장 답을 내놓지는 못할망정 진지하게 고민하고 국민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다음 대권은 그 답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느 쪽이 더 국민적 공감을 얻느냐에 따라 판가름나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가 맞고 있는 본질적 위기는 이러한 근본 의제는 생략된 채 정치가 지역 대립과 사회세력간 갈등을 바탕으로, 심지어 부추기면서까지 정권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심하게 말하면 나라와 국민은 어떻게 되든 정권만 잡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비쳐질 정도다.

여권은 실제 강하지도 못하면서 ‘강한 여당’을 내세워 야당을 압박하고, 야당은 반대를 앞세운 ‘정부 흔들기’로 이에 맞선다. 이 바람에 세상 분위기는 명치끝이 콱 막힌 듯 답답하고, 시장논리에 내몰린 사회적 약자들은 희망을 잃고 있다. 정치가 ‘너 죽고, 나 살기’식으로 치닫는 판에 공동체의 질서라고 온전할 리 없다. 내 몫부터 챙기자는 집단이기와 우리 편, 너희 편식 편가르기 의식이 도처에 팽배하다. 나라가 이 모양이 된 데 대해 여권은 줄곧 야당의 ‘발목잡기’를 탓하고, 야당은 여권의 ‘야당 죽이기’ 탓을 한다. 이 정부 내내 계속된 넌덜머리나는 ‘네 탓 타령’이다.

필자는 지난해 가을 이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민주당 총재직을 내놓고 큰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줄 것을 본란을 통해 여러 차례 당부했다. ‘내게 더 이상 무슨 정치적 욕심이 있겠는가.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으나 실수와 잘못도 적지 않았다. 이제 집권 여당의 총재직을 떠나 대통령으로서 남은 임기 동안 오로지 경제와 남북문제에만 전력하겠다. 그러니 야당도 날 좀 도와주고 국민 여러분도 대통령을 믿고 따라주기 바란다.’ 이를테면 이렇게 간곡하게 호소하기를 바랐다.

남북 화해에 큰 획을 긋고 평생의 민주화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노(老)대통령이 그렇게 호소했다면 국민의 감동이 어찌 없었겠는가. 영남의 ‘반(反)DJ 정서’인들 한층 누그러지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나온 것은 ‘장고(長考) 끝의 악수(惡手)’였을 뿐이다. 민주당 의원을 두 차례나 꿔주며 자민련을 국회교섭단체로 만들어주는 대가로 DJP 공조(共助)를 되살리고 원내 2석의 민국당을 끌어들여 이른바 DJP+α의 ‘강한 여당’을 만들었다지만, 국민을 감동시킬 수 없는 그런 식의 편법으로는 애당초 ‘강한 여당’이 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 보면 4·26 재·보선의 참패는 예정된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苦言을 덧붙이며▼

필자는 다시 김 대통령에게 민주당 총재직을 떠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정치는 타이밍인데 호기(好機)를 놓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만 한마디 고언(苦言)을 덧붙인다면 물이 흐르는 듯한 순리(順理)의 정치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 마지막 최선을 다하고 정권 재창출은 그 결과로 이루어지면 좋고, 안 돼도 국민의 뜻에 따른다는 ‘비운 마음’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도 김 대통령이 그럴 수 있도록 도울 것은 도와야 한다. 우선 나라에 희망의 기운이 돌게 해야 한다. 그것은 집권해야 할 이유와 명분을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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