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게 되는가…. 이미 실록이 그의 죽음에 대해 보리 이삭을 훔쳐먹다가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음에도 그걸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다 같이 똑같은 질문을 한다.
▼힘의 논리로 감추고 미화▼
그 이유는 참으로 간단하다. 승려 출신의 궁예는 맨주먹으로 일어나 백성들의 추앙과 존경을 받으면서 제국을 건설한 사람이다. 특히 그는 자신이 미륵임을 자처하고 대동방국의 북벌 의지를 강하게 앞세우면서 전제정치를 펴다가 왕건의 혁명으로 무너져 내리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살펴보건대, 그만한 인물이라면 아무리 신세가 궁핍하게 되고 배가 고팠다고 하더라도 보리 이삭을 훔쳐먹다가 맞아 죽을 만큼 치졸하고 소인배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실록에 그의 최후가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드라마 작가는 이런 결과를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것이다. 즉 실록을 믿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궁예가 도읍을 삼았던 철원 지방에 내려오는 이야기나 현존하는 지명을 보면 궁예가 결코 그렇게 처량하게 죽지 않았음을 뒷받침하는 여러 증표들을 찾아볼 수 있다. 궁예와 그의 부대가 왕건군과 격전을 벌였던 야전골이나 궁예가 은신했던 궁예왕굴, 끝내 항복하면서 항서를 전했다는 항서받골이라는 지명들은 기록에 남아 있는 역사와 사람들의 눈과 귀로 전해져 내려온 역사가 얼마나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 즉 힘의 기록이라고들 말한다. 패자는 기록할 권리는 물론 따져볼 자격도 없으려니와, 반대로 승자는 얼마든지 현실을 보다 더 유리한 쪽으로 각색하거나 심지어는 왜곡, 창작까지도 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로 계속해서 시끄럽다. 일본으로서는 감추고 싶은 역사이고 과거의 피해자인 우리로서는 잊어서는 안될 역사이다. 우리는 일본 스스로가 과거의 범죄를 애써 잊으려 하고 덮으면서 얼버무리려고 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고 또한 분개하고 있다. 그것은 저들이 다시 과거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염려와 함께 저들이 진실로 반성하고 있지 않다는 섭섭함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노와 우려에 앞서 그 저변에 깔린 일본의 기본 의식구조를 보다 자세히 관찰하고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과연 무슨 배짱으로 저렇게 나오는가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 또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저들은 지금 한때 움추렸던 패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다시 스스로 승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그만한 힘이 생겼음을 은연중 과시하기 시작했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 된다. 그들은 잘못 칠해졌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색깔을 지우고 현실에 놓여진 새 캔버스 위에 새롭고 당당하고 화려한 색을 덧칠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다시 덧칠한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마치 돈을 많이 번 전과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과거에만 매달려 집착해서는 안된다. 저들이 펴기 시작한 힘의 논리를 수백번 곱씹으며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의 진정한 힘은 지금 어느 정도나 되는지 하는 것을 말이다. 저들이 국제적인 여론을 무시하면서까지 왜곡된 교과서를 수정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이유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역사 과목 평가절하 안될 말▼
저들이 저토록 집요함을 보이고 있는 것과 비교해 지금 우리는 무얼 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우리의 역사 교육은 어떤 모습인가, 자성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의 교육 과정에서 역사 과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현저하게 줄어들거나 상대적으로 다른 과목보다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자신의 족보를 알지 못하면서 남의 잘못된 족보를 들먹이는 부끄러움과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 볼 일이다.
이환경(TV 드라마 '태조 왕건' 작가)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