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9단(26)이 89년 첫 타이틀을 따낸 지 만 12년이 됐다. 이 9단에게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격언이 통하지 않는 것 같더니 그것을 일깨워 준 사람이 18세 소년 이세돌 3단이었다. 15일 열리는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 3국에서 2대 0으로 앞서고 있는 이 3단이 과연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것인가, 아니면 이 9단이 역전의 계기를 마련할 것인가에 바둑계의 관심이 쏠려 있다.
이 9단의 성적은 분명 2000년을 기점으로 예전보다 못하다. 내용적으로는 제4회 잉창치(應昌期)배에서 우승했고 국가 대항전인 제2회 농심 신라면배 마지막 대국에서 가토 마사오(加藤正夫) 9단에게 이겨 한국팀에 우승을 안겨줬다. 그러나 최근 열린 국제대회(삼성화재배, 후지쓰배, 춘란배, TV바둑 아시아속기선수권전)에선 거의 1, 2회전에서 탈락했다.
바둑계에서는 이 9단의 현 상황을 두 가지 정도로 추측한다. 이제 바둑이 재미가 없어진 것 아니냐는 관측과 중요한 대국은 거의 이기고 있지만 중요하지 않은 기전은 열심히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쪽인지는 본인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이 3단은 지난해 이전까지는 재주만 믿고 공부를 게을리 한 ‘악동’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배달왕전 박카스배 등 2관왕에 올라 자질과 경력만으로는 세계 정상급에 오를 계기를 마련했다.
프로기사들은 이번 LG배가 이 3단에게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본다. LG배 타이틀을 획득하면 최고의 기사가 될 수 있겠지만 만약 3연패를 당해 진다면 그 충격은 오래 가고 이 3단의 앞날은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올초 대국이 많지 않아 성적은 큰 의미가 없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성적이 별로라는 것. 4월 열린 제12회 후지쓰배에선 모두 1회전에서 탈락했다. 이 9단은 60세의 노장인 이시이 쿠니오(石井邦生) 9단에게, 이 3단은 약체로 평가되던 대만의 저우쥔신(周俊勳) 9단에게 패했다. 즉 LG배 결승 1, 2국 이후 이 9단과 이 3단은 다른 기전엔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성적이 좋지 않다.
특히 1, 2국과 3국 사이의 간격이 두 달 정도로 긴 것은 이 9단보다 이 3단에게 오히려 고통이었다.
젊은 기사들은 이 3단의 우세를 점친다. 이 3단의 기량이 3판 중 한판은 건질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반면 중견 기사들은 현재 2대 0이긴 하지만 반반 승부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더욱이 내기를 한다면 이 9단 쪽에 걸겠다는 기사가 적지 않다.
그러나 소장파 기사들이 이 3단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것은 이 3단의 기풍 변화와 관련이 있다. 프로에 입문하기 전 이 3단의 바둑에는 정석이 없었다. 붙이고 젖히면 끊는 막가파식 전투형이었다. 프로에 입단한 뒤 그런 식으로 이기지 못하자 전투를 하다가 나름대로 타협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최근엔 실리파가 됐는데 이런 변화는 조훈현 9단과 유창혁 9단이 젊었을 때 경험한 것과 똑같다. 다만 이 3단은 이 두 명의 천재기사들의 성장 속도를 18세에 따라 잡았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바둑 공부도 열심히 하고 대국 시간도 길어졌고 승부 호흡 역시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이 3단이 유리하다고 본다.
김성룡 6단(프로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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