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바깥에서 볼 때는 사소한 일로 보일 시비가 교내에서 진화되지 못한 채 외부로 알려진 것은 분명 나도 그 일원인 대학의 부덕이다. 하지만 대학 순서의 나열방식을 재정의하는 것은 대학 본질을 어떻게 보는냐 하는 시각과 직결된 데다, 자칫 대학교육 전반에 파문도 예상된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은 사안이 되고 말았다.
▼시간강사에 맡기는 교약과목▼
기초 3대학을 먼저 적었던 것은 기초과학 및 학부교육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건 기초 3대학 격인 문리(文理)학과 교수들만 모인 교수회의에서 대학정책의 골격을 결정하는 미국 하버드대와 닮은 점이 있다. 반면, 단과대 순서를 새로 매긴 데에는 결과적으로 버클리대를 닮자는 인식이 깔려있지 않았나 싶다. 경쟁력 있는 연구와 산학협동을 중시해서 대학원 교육에 치중하는 곳이 버클리대다.
학부교육 방식에도 차이가 난다. 교수가 노벨상을 받고 나면 곧장 학부교육도 맡는 하버드대와는 달리, 버클리대는 박사과정생을 학부교육에 다수 투입한다. 이게 화근이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 명망교수를 만나겠다는 소망이 불발된데다 월남전 반전무드와 어우러져 60년대 말, 버클리 일대에서 격렬한 학생데모가 생겨났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서울대 학부교육에 미운 털이 박히기 시작했다. 서울대 입시에 목을 매는 풍조 탓에 중고교육이 왜곡됐다는 과장, 그리고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연구성 대학원 교육이 강화돼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해서 서울대 기초과학 관련 학부교육이 위기를 맞고 있다.
교양과목에 시간강사를 다수 투입하는 것도 불만인데다 취업전선 전망의 불투명 등이 가세해 학부생들이 학부공부의 요체인 관련 학문의 기초 쌓기는 등한히한 채, 단판 승부로 대박 을 노리는 고시준비에 골몰하는 파행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공계와 예·체능계를 뺀 나머지 많은 학부생들이 고시 주변을 기웃거리며, 진로가 분명하고 취업이 용이한 경영대생마저 절반이 고시에 매달리는 실정이라 언필칭 학문의 전당인 서울대는 바야흐로 고시학원 으로 전락했다. 이 지경이면 서울대 도서관의 비이공계 책은 고시용만으로 족하고, 학술서적을 갖춘다고 귀한 국고를 낭비할 필요도 없게 됐다.
결코 대학은 고시합격자나 배출하고 기술자, 벤처기업가나 키우는 그런 곳이 아니다. 배움을 좋아하고 선행을 즐기는 사회지도자 양성이 우선 목적이다. 그래서 교양교육과 기초학문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공학계 응용과학도 기초과학의 뒷받침 없이는 절대 설 수 없다. 한국사람이 대망하는 노벨상은 바로 기초과학에 대한 시상이다. 후발국이지만 전자산업의 경쟁력이 높은 인도는 수학교육의 우수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번 서울대 수첩시비는 대학의 경쟁력 제고와 BK 21 이란 이름의 전략산업 지원형 연구에 치중하는 대학 리더십의 결정에서 발단이 됐다. 무릇 대학은 학술조직인 만큼 전체 교수 평균 이상의 지력(知力), 동료조직인 만큼 교수들과의 친화력, 또한 관료조직인 만큼 수준 이상의 조직 장악력이 대학총장의 자격요건이라고 했다. 이 가운데 다른 것은 몰라도 평균이상의 지력이란 당장 돈을 만들 수 있는 분야 위주의 관심만이 아니라 문·사·철(文·史·哲)의 인문적 식견과 사회질서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 그리고 자연질서에 대한 이해 등 기초과학의 정당성을 깊이 인식하는 균형 잡힌 양식도 요구된다는 뜻이다.
▼돈되는 공부밖에 몰라서야▼
작금에 대학도 비즈니스라며 경영마인드를 자랑하는 총장이 다수 등장했다. 물론 총장에겐 미국식의 그런 능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기대는 그 이상이다. 능력도 중요하지만 얼마 만큼 존경도 받을 수 있는 인물이라야 한다. 존경받을 수 있는 총장이란 최소한, 해서는 안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신지식인 선호형, 첨단산업 육성형 교육에 치중하면 했지, 체면이라도 지켜줘야 할 기초과학들을 굳이 경시하는 뜻의 대학순서 바꾸기로 대학 안팎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조치는 존경받을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김형국(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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