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너무 빨리 서구화와 개방이 진행돼 이슬람 전통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중세 도읍지 페스에서 만난 시민운동가로 전통 복장 ‘질레바’와 스카프 ‘히잡’을 고집하는 타들라위씨(36·여)는 급변하는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여고 3년생 둔야 부스프(18)는 ‘배꼽 티셔츠’에 몸에 꽉 끼는 청바지 차림. 이 신세대 여학생은 “언제까지 이슬람 전통을 고집할 수는 없잖아요”하며 오히려 ‘더딘 변화’를 불평했다.
중세 유럽 대륙에 진출, 스페인을 장악했던 모로코는 이후 세력을 잃고 20세기초 유럽 국가인 프랑스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회 전반의 이슬람 색채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이슬람 국가에 비해 그다지 강하지 않다. 1999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즉위한 다음 개방 개혁정책이 추진되면서 산업화와 이슬람 전통이란 상반된 가치가 자주 충돌하고 있다.
10년전 말과 마차가 활보하던 도심은 벤츠와 BMW 등 유럽산 승용차로 메워졌다. 선글라스와 미니스커트 차림의 신세대 여성들은 일본산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한다. 도로 옆 야자수 그늘에서 쉬고 있던 남루한 ‘질레바’차림의 노인들은 세상 변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총각 국왕 모하메드 6세(37)의 혼사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대도시 변두리의 신흥 주택단지에는 TV수신 안테나가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하지만 시골은 물론 도시의 골목길을 가보면 중세시대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지 않나 싶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비좁은 골목에는 일자리가 없는 가장끼리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다. 흙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외국인 관광객이 나타나면 쏜살같이 달려가 동전을 구걸했다.
봉제, 식품가공, 기계와 전자제품 생산, 관광업 등이 주요 산업이지만 일반의 삶은 그다지 풍족하지 않다. 마라케시에서 관광 마차를 모는 나문 압둘자릴(36)은 “유럽 관광객이 늘어나 한 달 수입이 100달러를 넘었지만 아내와 여섯 아이를 부양하기 힘겹다”고 말했다. 방 세 개를 가진 집에서 살아보는 것이 그의 꿈.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모로코 서민처럼 이 꿈을 이루기 힘들 것이다.
최근 마라케시와 라바트 등 대도시 외곽에는 수영장, 미니 골프장을 갖춘 호화 별장이 속속 지어지고 있다. 도심에는 10층 이상의 외국 기업 건물이 앞다퉈 올라가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카사블랑카 무역관 최동호(崔東湖·42)관장은 “개방 정책이 실효를 거두며 자동차 조립과 IT산업 등 산업 전반이 활기를 띠고 있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1999년 5만명에 불과하던 휴대 전화 가입자는 올해 300만명을 넘어섰다. 전체 투자의 45%, 수출의 37%를 맡고 있는 ‘경제 수도’ 카사블랑카에는 봉제 식품 가공 등 경공업 공장과 전자와 기계 공장, IBM 아프리카 지사와 피아트 조립 공장 등이 자리잡고 있다.
모로코 정부는 지난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관세를 낮추고 모로코 텔레콤과 국영 항공사 등 국영기업의 민영화도 추진 중이다.
파탈라와라루경제재무장관(58)은 “국왕이 직접 특별투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최적의 투자 여건을 마련하고 있다”며 한국 기업의 적극 진출을 당부했다. 지브롤터해협에 인접한 도시 탕제에는 6000만달러(약770억원)를 들여 2005년까지 여의도 면적의 1.5배에 해당하는 120만평 규모의 수출자유공단이 조성된다. 탕제 공단의 오마르 샤이드 연락관(33)은 “스페인과 일본 공장이 이미 입주했고 2004년까지 폭스바겐과 미국 폴리텍 테팅 등 1000개 기업이 입주하면 6만명의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최근에는 약 30억배럴 매장량을 가진 유전이 발견돼 에너지 개발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다. 90년대 3%의 경제성장률은 내년 이후 8%대를 유지할 것이라고 정부 관계자들은 낙관했다.
그러나 비대한 관료층 등 기득권 계층에 만연된 부정 부패가 경제 성장을 막고 있다.
최근 국왕이 한 지방 관서를 예고 없이 순시했을 때 10여명의 공무원 중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대부분 출근하지 않고 개인 사업을 해 온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카사블랑카의 한 40대 택시 운전사는 “고급 승용차는 법을 어겨도 눈감아주면서 영업용 택시는 걸핏하면 꼬투리를 잡아 아예 교통 경찰관한테 바칠 뇌물용 돈을 갖고 다닌다”며 부패상을 고발했다. 개방 정책에 따른 발전과 성장의 앞길을 청산되지 못한 왕조시대의 부패문화가 막아서고 있었다.
▼부할리 공업청장 "머지않아 지중해경제권 형성"▼
“유럽의 미래는 아프리카와 아랍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머지 않아 남유럽과 아프리카북부 일대의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제권이 형성될 것입니다.”
프랑스 보르도대 경영학박사 출신으로 93년 부임 후 경제개발을 주도해온 무라스 부할리 공업개발청장(49)의 말이다.
-급격한 사회변화에 대한 보수층 반발이 만만치 않은데….
“전통과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모든 국민이 모로코 경제개방정책의 수혜자가 될 것이란 점이다.”
-특히 이혼과 상속 등에서 여성의 불만이 많은데….
“이슬람 국가 중 아마도 모로코의 여성이 가장 자유로울 것이다. 모로코항공사의 조종사 가운데 3명이 여성이다. 모로코가 이슬람국가란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구화, 개방정책에 대한 다른 이슬람 국가의 우려도 있는데….
“경제적으로 최근 유럽국가와 유대가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모로코는 역사 언어 종교상 이슬람국가에 틀림없다. 경제 교역량의 70%가 유럽연합(EU)과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아랍지역의 자유무역지대 건설 등에 연대참여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주철기 대사 "값싼 인력-천혜 입지…투자가치 커"▼
“모로코는 아프리카와 유럽의 교두보로 기업 투자가치가 큰 곳입니다.”
주철기(朱鐵基·55) 모로코 주재 대사는 모로코에 한국 기업이 적극 진출할 것을 주장했다. 주 대사는 최근 압델라만 유수피 총리와 파탈라 와라루 경제재무장관으로부터 전통적인 우방인 한국 기업이 투자한다면 적극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모로코는 아프리카 국가 중 정치가 가장 안정된 나라로 2012년 유럽연합(EU)과 완전한 자유무역이 이뤄진다. 대우그룹의 자금난에 따른 해체 사태로 99년 카사블랑카 누아세르 지역에 약 10억달러를 투자해 자동차와 전자공단을 조성하려던 계획이 백지화되면서 ‘경제대국 한국’의 이미지는 많이 훼손됐다. 하지만 대우가 추진했던 원대한 계획은 서구 국가의 투자의욕을 촉발해 최근 일본 기업이 4000만달러 규모의 자동차부품 공장을 건설하는 등 탕헤르 일대에 외국인 투자붐을 일게 했다.
주 대사는 “모로코는 값싼 고급 인력과 적극적인 지원 정책, 천혜의 입지조건이란 ‘3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다”면서 “특히 전자, 섬유, IT산업 분야와 도로 통신망 정비에 한국의 기술을 활용할 여지가 많다”고 강조했다.
<카사블랑카=백경학기자>stern100@donga.com
▽약사
BC 11세기 페니키아인 이주
BC196년 로마지배. 카르타고인 이주
AD 253년 베르베르인 지배
787년 이슬람 이드리아 왕조
1062년 모라비드 왕조. 대제국 건설
1145년 모하드 왕조
1492년 스페인 영토 상실
1912년 프랑스 보호령이 됨
1956년 독립
1961년 하산2세 즉위
1999년 모하메드6세 즉위
▽개요
인구:2914만명
면적:71만850㎢(한반도의 3.5배)
주요도시:라바트(수도·146만명), 카사블랑카(304만명), 마라케시(80만명)
국가형태:입헌군주제(국왕 모하메드6세)
인종:아랍인(60%), 베르베르인(36%), 흑인 유대인 등(4%)
언어:아랍어, 베르베르어, 프랑스어
종교:이슬람 수니파(98.7%), 기독교(1.1%), 유대교(0.2%)
1인당 GDP:1293달러(2000년 기준)
실업률:14.2%
외채:172억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