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생을 무겁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라 다만 '가려운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이화경의 첫 소설집 '수화'(민음사)는 육체가 겪는 고통을 잔인한 상황으로 몰아가면서 그러한 상황을 '가려움'이라는 상징으로 그려내고 있다.
단편 '생이 가렵다'의 주인공은 다리가 잘려 환통(幻痛)에 시달리는 아버지와 선천성 고통 무감각증에 걸려 자신의 손을 물어뜯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아들을 둔 사내. 그러나 삼대(三代)에 걸친 이 무시무시한 고통의 한가운데서 사내가 느끼는 것은 우습게도 '가려움증'이다.
결말 부분에서 이 사내는 아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면서 아들을 흉내내 웃어본다. 무감각증 환자인 아들이 유일하게 느끼는 감각이 가려움이라는 점도 생경하지만, 아무런 희망도 없을 것 같은 이 상황에서 사내가 뱉어내는 '인생이 가렵다'는 중얼거림은 고통의 극단까지 가본 사람이 내뱉을 수 있는 멍한 독백을 떠올리게 한다.
표제작인 중편 수화(手話)의 주인공 '나'는 열아홉에 손가락 세 개를 잃은 장애인이다. '나'는 가난한 가족처럼 살고 싶지 않아 집안의 만류를 뿌리치고 인문계 여고로 진학한다. 나는 손에 익지 않은 작두질을 하다가 손가락 세 개를 잃고, 같은 또래의 여자 친구와의 동성애를 통해 자신을 되찾는다. 그러나 그 친구마저 떠나가고 나는 고독하고 폐쇄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처럼 절지(切指), 환통, 무감각증 같은 육체적 훼손을 작가는 어쩔 수 없는 인생의 운명적 비애로 환치시킨다. 그러면서 육체가 겪은 상처, 즉 돌이킬 수 없는 운명에 인간은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 것인가를 묻는다.
이화경의 소설은 이 질문에 멈춰 서 있다. 결핍된 육체를 파헤치면서 작가가 펼쳐낸 그로테스크한 상황은 나약한 육체를 지닌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데 그치고 있다. 가려움증을 견뎌 새살이 돋아난 뒤의 삶은 독자들이 자문해야 할 몫인 셈이다.
이화경은 1997년 <세계의 문학>에 '둥근나팔꽃'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작가의 첫 창작집인 이 책에는 '둥근나팔꽃' 외에 평균적인 삶을 벗어난 사람들을 그린 '늪', '음력십삼월', '벚꽃나무'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수화/ 이화경지음/ 214쪽/ 값7000원/ 민음사>
안병률/ 동아닷컴기자mok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