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과 여론이 다른 말인가▼
민심은 제법 대접받고 있는 것 같은데 여론은 홀대받고 있다. 여론과 민심이 그렇게 다른 의미를 가진 말인가? 아니다. 민심은 가장 중요한 여론의 한 범주다.
여론의 첫 번째 의미는 '대중의 의견'이다. 주로 여론조사 결과로 나타난다. 어떤 이슈에 대한 대중 개개인의 의견들을 집계해 놓은 것이다. 김대중 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곤두박질하고 있는 것도 여론조사 결과에서 나타났다. 여론을 홀대하는 발언이 나올 법도 하다.
여론의 두 번째 의미는 '적극적 공중의 의견'이다. 적극적 공중이란 정당, 이익단체, 시민단체를 이끄는 사람이나 기업의 로비스트, 그리고 언론인 등을 말한다. 한마디로 목소리 큰 사람들의 의견을 말한다. 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시민단체를 이끄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높다. 문제는 적극적 공중의 의견이 대다수 국민의 의견을 잘 반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목소리 큰 사람들의 의견을 국민 대다수의 의견으로 잘못 알았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15대 총선 당시 시민운동가 하면 곧바로 연상되는 한 인사가 서울, 그것도 중산층 지식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더블 스코어로 참패했던 일도 있었다. 요즘 정부를 끌어들여 신문을 개혁하자는 목소리 큰 사람들의 의견도 과연 국민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여론의 세 번째 의미는 '인식된 대다수(majority) 의견'이다. 여론을 조작할 때 자주 이용하는 여론의 형태다. 가령 언론 개혁은 국민 대다수의 요구다 , 또는 '국민 대다수는 개혁의 지속을 원한다'는 식으로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내세울 때 이용한다. 그런데 그 지지의 출처를 추적해 보면 요즘 언론에 문제가 많다고 하는데 언론개혁을 찬성하십니까? 하는 따위의 아주 유치한 질문으로 답변을 유도한 여론조사에 근거하고 있다. 이른바 '밀어붙이기 여론조사(push poll)'의 한 형태다. 이런 엉터리 여론조사의 폐해가 확산되자 여론조사에 관한 한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미국여론조사협회는 1996년 특별성명을 통해 밀어붙이기 여론조사는 결코 여론조사가 아니라고 못 박았다. 과학의 이름을 빌린 일종의 사기라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민심과 아주 흡사한 여론의 형태는 '잠재(latent) 여론'이다. 여론의 가장 중요한 범주다. 국민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생각으로 통상적인 여론조사로는 잘 잡히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론조사의 구체적인 질문에 응답하는 의견들의 토대가 되는 숨겨진 본심이다. 가령 국민들이 말은 하지 않아도 10년 가까이 민주투사들에게 나라를 맡겨보니 나라꼴이 영 말이 아니다. 투사 경력과 국가경영 능력은 다른 것 같다. 그들의 민주화 공적은 인정하지만 오늘날 '한국과 같은 규모와 수준의 나라를 감당하기에는 힘이 붙이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국민의 속마음이 바로 민심 또는 잠재 여론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이런 속마음을 공개적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성공한 대통령들은 바로 이 잠재 여론, 즉 국민의 속마음을 잘 읽어냈다는 것이다.
▼'잠재 여론' 너무도 몰라▼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최근 '6공(功) 5과(過)론'이니 'JP 대망론'이니 하는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참말로 국민의 잠재 여론 또는 민심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얘기들이 나와서 국민을 절망감 속에 빠뜨릴 때마다 흔히 나오는 질타는 '민심을 제대로 보고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민심을 제대로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심과는 동떨어진 얘기들이 나온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이제는 세월이 흐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가.
이민웅(한양대 언론학과 교수·본사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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