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대를 앞둔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하루 하루를 지낸다. 입대할 경우 걸핏하면 전투가 벌어지는 체첸에 투입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열악한 군대생활을 배겨내는 일이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은 재정난으로 부식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병사들을 감자와 양배추 캐기에까지 동원한다. 구소련 시절 세계 최강이던 ‘붉은 군대’의 위용은 사라지고 병영에는 마약과 동성애가 만연해 있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군입대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은 일상화된 병영내 폭력과 의문사다. 고참 병사들의 심한 폭행과 총기사고 등 각종 사고로 수많은 병사들이 희생되고 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병사들의 어머니회’를 만들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지만 의문사는 줄지 않는다. 병사들의 어머니회에 따르면 한해 5000여명의 병사들이‘의심스러운 죽음’을 당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군에 가지 않으려는 노력도 필사적이다. 면제와 징집유예를 받기 위해 고액의 뇌물이 오간다. 러시아군 검찰에 따르면 징집을 유예하려면 5만2000루블(약 240만원)이 필요하다. 월평균 임금이 97달러(약 12만6000원)인 러시아에서는 거액이다.
형평성도 문제다. 국립대 학생들은 재학 중 교련교육을 받는 대신 병역을 면제받는다. 그러나 사립대생들은 교련 과정이 없어 면제는커녕 징집 유예조차 받지 못한다. 이들은 99년 헌법재판소에 제소했지만 패소했다. 러시아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국립대에 진학한다.
결국 돈이 없고 학력이 낮은 청년들만 입대한다는 얘기다. 군의 수준과 복무 여건이 더욱 악화되고 어쩔 수 없이 군에 가야 하는 대다수 젊은이들의 좌절감은 대단하다.
병역기피가 심해지면서 지난해에는 징집인원을 채우지 못한 국방부 관리들이 거리에서 청년들을 강제로 끌고가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최근 모스크바 대학가에는 오랜만에 시위대가 등장했다. 대학생들이 병영내 폭력해소 등 군복무여건 개선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인 것.
러시아군의 최대 행사인 2차대전 승전기념일인 9일 붉은광장에서는 화려한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그러나 군복무를 앞둔 청년들은 퍼레이드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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