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신작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 문장 하나가 유난히 눈에 밟혔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아마도 이 구절이야말로 작가가 현재 처한 상태와 마음의 일렁임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문장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작가가,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가운데 겨우 겨우 써내려 간 정신적 고투의 흔적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이 소설에서 조선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명장(名將)이자 민족의 영웅인 한 인물의 초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고통스럽게 살아 넘기고 있는 한 작가-지식인의 처절한 내면의 기록을 본다.
즉 역사적 인물인 이순신이 우리 시대의 한 작가에 의해 다시 되살아났다기보다는 현재를 살고 있는 한 작가가 이순신이란 ‘페르소나’(가면)를 빌어 자신의 내밀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이 작품이 보여주는 진실에 더 가까울 게다.
이순신이 1인칭 화자의 역할을 맡고 있지만, 가령 “무술년 초가을에 상륙 특공대 300명을 보내 광양만 어귀 적의 통신 축선 거점들을 소탕했다”라는 문장의 발설자가 조선 시대의 한 무인이라고 믿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순신의 가면을 쓴 현대의 작가가 현재의 시점에서 사실을 재구성하여 진술하고 있다는 관점이 보다 온당할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이순신의 ‘전략’이나 ‘리더십’ 따위를 예찬하고 있는 소설이 아니며, 그의 일생이 보여준 강직한 충의(忠義)를 숭앙하고 있지도 않다. 더구나 시대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민족 영웅의 창조를 목표로 하고 있지도 않다.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이순신은 차라리 현대적인 의미에서 삶의 무의미와 죽음의 현존 앞에서 고뇌하는 한 고독한 실존주의자의 모습에 근접해 있다. 작가는 이순신의 내면 깊숙이 침투해 이순신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지만 그 말의 실질적 주인은 이순신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 김훈 자신일 것이다.
소설은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는 대목에서부터 시작해,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에서 끝맺고 있다.
적과의 실질적인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동안에도 그는 쉴새 없이 싸운다. 멀리서 장렬한 수사로 가득 찬 교서만 연이어 내려보내는 임금과 싸우고, 호시탐탐 그의 목을 노리는 조정의 대신들과 싸우고, 대군을 이끌고 와서 무작정 세월만 보내고 있는 명나라 장수와 싸우고, 군령을 어기는 부하들, 울며 매달리는 가엾은 백성들과 싸운다.
그러나 시종일관 이순신이 싸우는, 싸워야 하는 궁극적 대상은 바로 자신이다. 그는 자기 마음 속의 지옥과 싸운다.
그 싸움은 그 어떤 보답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그 어떤 가치의 수호도 가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욱 비극적이다. 충효(忠孝)라는 봉건적 에토스마저 걷어낸 자리에 이순신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무(無)로서의 무(武)’일 뿐이다. 그 ‘무(武)’는 그것이 봉사할 어떤 가치도 상정하지 않는 자기 충족적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무(無)와 통한다. 김훈에 따르면 이순신은 무(無)로 가득 찬 세계에서 무(武)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은 지독하게 덜컹거렸다. 아마도 나 또한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날들을 살아넘기고 있는 모양이다.
남진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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