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 자율학습안 세워 '담임과 계약'
프랑스 남부 항구 도시 마르세유 트레이 초등학교 5학년 조아나(10)는 주말마다 담임 선생님 보라 코린(여)과 ‘협상’한다.
매일 1시간씩 주어지는 자율학습 시간에 어떤 과목을 얼마나 공부할 것인지, 친구들을 위해 학교에서 어떤 일을 맡아야 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이다.
조아나는 협상 결과를 ‘계약서’로 작성했다.
‘△월:철자연습용 문제지 2쪽, 작문 1편 완성 △화:철자연습용 문제지 2쪽, 수학 문제지 2쪽 △수:휴일 △목:철자연습용 문제지 2쪽, 수학 문제지 1쪽, 응용수학 문제지 1쪽, 기하학 문제지 1쪽 △금:철자연습용 문제지 2쪽, 기하학 문제지 1쪽 △기타:책 2권 읽기. 학급 회의 때 서기로 봉사하기…’
조아나는 교사가 짠 시간표에 따라 공부하지 않는다. 흥미가 있어 좀더 깊이 공부해보고 싶은 과목과 반대로 보충 학습이 필요한 부분을 스스로 판단해 학습 계획을 세운다. 자율과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트레이 학교가 채택한 ‘프레네 교수법’의 특징이다.
▼글 싣는 순서▼ |
-2부 다양성이 경쟁력- |
▽계약서 쓰는 학생들〓프레네 교수법을 사용하는 초등학교 학생들은 일주일 동안의 학습 및 활동 계획을 세워 담임 선생님에게 보여준다. 담임 선생님은 계획서를 훑어보고 보완할 점이 있으면 학생과 상담한 뒤 합의 내용을 ‘계약서’로 작성한다. ‘계약서’라고 부르는 이유는 약속 위반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는 뜻에서다.
계약서대로 했는지, 할 일을 다음 요일로 미뤘는지, 아예 하지 않았는지를 학생 스스로 계약서에 표시해야 한다. 계약서 아래에 자신의 일주일을 평가하는 항목과 학부모가 평가하고 서명하는 칸을 두어 스스로 약속에 얼마나 충실했나를 정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코린 교사는 “학생들마다 관심 분야와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인 시간표를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면서 “‘계약서’는 스스로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배우고 책임감을 기르는 데 유용한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공부에는 동기 유발이 중요〓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엑스앙프로방스의 마레샬 초등학교. 이 학교 1학년생은 부활절 방학을 며칠 앞두고 프랑스어 시간에 ‘부활절 달걀 만드는 법’을 배웠다.
학생들은 교사가 나눠준 복사물을 떠듬떠듬 읽어 내려갔다. 부활절 달걀의 유래에서 시작해 만드는 절차를 담은 복사물은 1학년생들이 읽기 힘든 단어투성이였다.
“프레네 학교에서는 난이도에 따라 배우는 순서를 정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흥미를 느끼면 어려워도 기를 쓰고 알려고 들지만 재미가 없으면 아무리 쉬워도 딴전을 피우거든요.”
생물 시간에 현미경 사용법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 학생들에게 현미경을 하나씩 준 뒤 스스로 작동법을 찾도록 내버려둔다. 이리저리 작동해보다 지칠 때쯤이면 호기심은 극도에 달하며 이때서야 교사가 개입한다. 배운다는 것은 문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문제를 만들어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는 것.
기자가 취재간 날에는 한국에 관한 즉석 수업이 이뤄졌다.
학생들은 지구본에서 서울을 찾아보기도 하고 “기자가 뭐하는 사람이냐” “한국어로 이름을 써달라” “한국은 무엇으로 유명한가” “한국 학생들은 영어를 언제부터 배우나” 등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말글’을 배우는 국어시간〓국어 교과서는 없다.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말글’이 수업 자료이자 교과서다. 만화의 지문을 채워넣거나 학교 식당의 메뉴를 해독하기도 하고 치즈케이크가 먹고 싶으면 요리책에서 치즈케이크 만드는 법을 발췌해 읽는다. 말글을 배우는 이유는 같은 단어라도 사용하는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
학생들은 말글을 배우며 스스로 문법 노트를 만든다. 단어의 여성형이나 불규칙 동사 변화가 튀어나오면 그때그때 적어두고 이것이 쌓여 자신만의 문법책이 된다.
남의 말을 듣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커뮤니케이션도 프레네 교육이 강조하는 대목.
학생들은 미술시간에 제작한 그림이나 공작품을 가지고 나와 설명한 뒤 친구들의 질문을 받고 답변한다.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사물이나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방어하는 법을 배운다.
▽나의 책임〓프레네 학교에서는 학생들 모두 학교를 위해 스스로 선택한 ‘책임’이 한가지씩 있다. 트레이 학교 3학년생 마튜(9·1년 유급했음)는 잡지를 읽다 재미있는 기사가 있으면 요약해 들려주는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프랑스 축구 영웅인 지단의 활약상과 파리의 어린이 불법 체류자에 관한 기사를 읽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줬다.
2학년 여학생 루(7)는 수업 시작 전 친구들에게 연필을 나눠주고 수업이 끝나면 다시 걷는 일을 한다. 이 밖에도 등교시간에 문 열어주기, 학교에 오는 전화 받기, 쓰레기 줍기, 실험도구들을 제자리에 갖다놓기 등 원활한 단체생활을 위해 학생들은 모두 한가지씩 기여하는 활동이 있다.
◇프레네 교수법은 경쟁-지식위주 탈피…'현장'중시 대안교육
프레네는 프랑스의 대표적 대안교육이다. 1920년대 이 교수법을 창안한 개혁적 교육 운동가 셀리스틴 프레네의 이름에서 따왔다. 대안교육이 대부분 사립학교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과 달리 프레네는 공립 초등학교에서 시도되는 교수법이다.
프레네 교육이 독립된 학교에서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정형화된 틀이 아닌 커다란 방향성만 제시하고 ‘현장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구체적 운영 방식은 교사마다 학교마다 다르다.
교사들은 수업이 없는 수요일이나 주말을 이용해 프레네 교수법을 배우고 이를 학교 현장에서 실험한다. 학교에 따라 1, 2개 학년에서 프레네 교수법을 활용한다. 모든 학년에서 프레네 교육을 하는 학교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16개 학교가 프레네 교수법을 도입해 교육하고 있으며 독일 벨기에 스웨덴 스페인 등 주로 유럽에서 이 교수법을 활용하는 학교들이 많다.
프레네 교육은 대부분의 대안 교육 운동이 그러하듯 효율과 경쟁, 지식 전수를 강조하지 않는다. 무슨 문제가 닥치더라도 스스로 상황을 분석하고 능력에 맞게 대응하며 자신이 한 일에 철저히 책임지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목표다.
특히 교육과 현실의 간극을 없애는 노력을 한다. 생활과 유리된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마레샬 초등학교 아니크 토마 교사(여)는 “프레네가 농촌에서 교육운동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도시생활을 담고있는 교과서를 버리고 시골 전원을 소재로 한 수업 자료를 개발하는 일이었다”며 “생활과 유리되면 학습 동기 유발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개는 1∼2학년, 3∼4학년이 한 반을 이뤄 수업한다. 하루 1, 2시간은 자율학습시간을 줘 혼자 계획을 세워 공부하도록 한다.
◇트레이 초등교 학급회의를 보니…
"축구놀이 탓에 구슬치기 못해" 등
전교생 70명 안건마다 열띤 토론
프레네 학교에서는 매주 한차례 학급 회의가 열린다.
학교의 주요 행사 일정을 짜고 역할을 나누고 또 공동체 생활에서 불거져 나오는 이런 저런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이다.
마르세유 트레이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마침 학급회의가 열렸다.
1학년에서 5학년(프랑스 초등학교는 5년제)까지 전교생 70명이 교사 3명과 한 교실에 빙 둘러앉아 출석을 부르는 것으로 회의가 시작됐다.
지난주 회의 때 지적된 사항이 바로 잡아졌는지 점검하고 다음달 발행하는 교지에 실을 내용과 담당자를 정하는 일이 끝나자 회의의 서기를 맡은 조아나가 학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작은 상자 뚜껑을 열었다.
학생들이 회의 때 이야기하고 싶은 안건을 써넣은 쪽지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조아나가 쪽지를 한 장씩 꺼내 읽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에 축구놀이를 하는 학생들이 좁은 운동장을 다 차지해 구슬치기를 할 수가 없다.’
학생들은 토론에 부쳐 축구하는 시간을 제한해 구슬놀이도 번갈아 할 수 있도록 조정했다.
조아나가 다음 쪽지를 읽자 학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농이 남학생 따귀를 때렸다.’
“왜 때렸지?”
“내가 욕했거든.”
“그럼 마농이 왜 때렸는지도 썼어야지. 욕을 하니까 맞았잖아.”
다음 쪽지는 더욱 폭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학교 요리사 코린을 바꿔달라. 잔소리가 심하다. 밥을 다 먹고 복도에 서 있으면 왜 그렇게 빨리 먹었느냐고 야단을 친다. 한번은 밥 먹다 친구보고 웃었다고 벽보고 서있는 벌을 받기도 했다. 학기 초엔 안 그랬는데 요즘 부쩍 신경질이 늘었다.’
이번엔 교사들이 개입했다.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너무 말을 듣지 않아 화가 날 때가 있다.”
“요리사의 이야기를 일단 들어보겠다. 그리고 그 사람은 국가 공무원이어서 우리에게 해고할 법적 권리가 없다. 그러나 이야기는 충분히 해보겠다.”
이번에는 ‘2학년 일동’이 써낸 쪽지가 안건에 올랐다.
‘1학년생들이 2학년생 공부를 방해한다.’
토의 결과 2학년생의 수학 시간에 1학년생들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미술수업을 받아 생긴 일이었다. 결국 수업 시간을 조정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쪽지가 끝도 없이 나왔고 학생들은 쪽지 하나하나를 토론을 거쳐 처리해나갔다.
‘로벵이 자꾸 자기 엉덩이를 보여준다.’
“그건 주먹으로 때리는 것만큼 거친 행동이니 자제하라.”
‘전화 받는 당번인 루도빅이 메모를 잘 전해주지 않는다.’
“집에서 연습을 많이 하겠다.”
‘파스칼이 내 노트에 하트를 그려놓고 간다.’
“좋아서 한 일이겠지만 감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말라.”
서기는 처리된 쪽지들을 노트에 하나씩 풀로 붙여 정리했다.
학급회의는 1시간 남짓 계속됐다.
<마르세유〓이진영기자>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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