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매립지는 식물들의 '소리없는 전쟁터'

  • 입력 2001년 5월 23일 18시 53분


흔히 ‘식물의 불모지’로 생각하기 쉬운 쓰레기 매립지.

그러나 척박한 이곳에서 정글처럼 거대 식물이 자라나거나, 토종식물과 귀화식물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펼치는 등 독특한 생태계가 조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판 황무지’에서 꽃이 활짝 피어난 것이다.

서울대 이은주 교수(생명과학부)와 박사과정 김기대 씨는 수도권 주변의 쓰레기 매립지 10여 곳을 조사한 결과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고 23일 밝혔다. 김기대 씨는 이 연구를 담은 박사학위 논문을 곧 발표할 예정이다.

매립지중 가장 독특한 곳은 경기 동두천시 상패동 매립지. 이곳에는 거인국을 연상시킬 정도로 다른 곳보다 크게 자란 식물이 많았다. 특히 흰명아주는 사람 키를 훌쩍 넘어 2m가 넘을 정도였다. 흰명아주는 보통 1m를 넘지 않는다. 강아지풀 등 다른 식물들도 50%정도 더 크게 자랐다. 김기대 씨는 “다른 곳에서 연구할 때는 풀을 내려다 봤는데, 이곳에서는 올려다 보느라고 목이 아플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곳의 식물들이 이처럼 커진 것은 쓰레기의 풍부한 영양분 덕분이다. 매립지는 수명이 끝나면 자갈과 흙을 덮은 뒤 그 위에 풀을 심지만, 이곳에서는 흙을 제대로 덮지 않아 식물들이 영양 만점의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자란 것이다. 다른 매립지의 식물들이 척박한 환경에서 고생한데 비해 이곳 식물들은 귀족생활을 누린 셈이다.

매립지에서는 귀화식물과 토종식물들의 대결도 치열하다. 다른 곳과는 달리 터주대감이 없었기 때문에 토종식물과 귀화식물의 선점 경쟁이 더욱 뜨거웠던 것. 주로 주변환경이나 매립지의 영양 조건에 따라 승부가 결정됐다.

도시에 가깝거나 척박한 환경의 매립지는 귀화식물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귀화식물의 강인한 생명력이 경쟁력을 높였던 것.

도시와 가까운 경기 파주 매립지는 파주시 길가에도 많이 볼 수 있는 귀화식물인 단풍잎돼지풀이 90% 이상 뒤덮고 있었다. 인천시 경서동 매립지는 원래 큰김의털이 심어져 있었지만 군데군데 바닷가에 사는 귀화식물인 갯드렁새, 큰비자루국화 등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야산으로 둘러쌓인 경기 이천 모전리 매립지와 성남시 하산운동 매립지는 토종식물인 버드나무 등이 많았다. 제방 옆 비탈에 조성된 경기 평택 매립지에는 축구장만한 습지가 조성됐으며, 역시 토종식물인 세모고랭이, 골풀, 불방동사니, 무럭새 등 매립지중 가장 다양한 식물들이 살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비옥한 환경에서는 토종식물도 강세를 띤 것이다.

매립지에서는 튜울립, 자귀나무, 쥐똥나무 등이 잘 자랐다. 앞으로 이들을 매립지에 심으면 현재 아카시나무가 주종인 쓰레기 매립지가 좀더 다양한 생태계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은행나무나 단풍나무는 바로 죽거나 시들시들해졌다.

이은주 교수는 “미국에서는 쓰레기 매립지에 흙을 덮은 뒤 낙엽층을 깔아놓는다”며 “우리도 매립지에 흉하게 흙만 덮을 게 아니라 생물들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제2의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상연 동아사이언스기자>

dream@donga.com

<김상연기자>dre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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