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본 가고시마에서 온 도예가 심수관(沈壽官)씨 강연회에 갔다. 귀한 손님 심씨를 맞는 행사로 사물놀이가 펼쳐졌다. 천장은 낮고 사방은 비좁은데 마이크까지 켜놓은 채로 한마당이 펼쳐졌다. 뒤편의 내 귀에도 꽹과리 소리는 지겨운 소음이고 ‘고문(拷問)’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울렁거려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무대 코앞의 심씨나 점잖은 빈객들의 고통은 어땠을까.
▼조선정부는 무엇을 했습니까▼
나중에 외교통상부에 물어보았다. 외빈을 접대할 때 사물놀이를 보여주느냐고 했더니 부채춤 정도만 보여준다는 답변이었다. 너무 시끄러우면 오히려 외국손님들에게 결례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국악계에 알아보았더니, ‘징소리가 실내에선 너무 크기 때문에 음량을 줄이는 방안을 연구해보았으나, 꽹과리 소리는 아직…’이라는 얘기였다.
문화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요, 정신에 울림을 주는 것이다. 우리 것 한국문화가 진정 우월하고 자랑거리라면 세계의 듣는 이, 보는 이, 문화 고객들이 느낌으로 즐겁게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공연자(문화공급자)인 우리가 아무리 신나고 흥이 나도 외국 손님들이 시큰둥해 하거나, 귀청 때리는 소음으로 듣는다면 별 의미가 없다.
일본인 번역가 쓰루 신스케(鶴眞輔·작고)의 열변이 생각난다. 그는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20여년을 일한 한국통이었다. ‘임진왜란 때 심수관씨 조상 같은 도공들을 기술노예로 잡아간 건 왜병들이고 분명 범죄였지요. 그렇지만 한국분들도 생각해 볼 게 있어요. 만일 그런 계기가 없었다면 남원 도자기를 모태로 한 사쓰마 야키(도자기)가 어떻게 세계적인 상품이 되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유럽인을 찬탄케 한 히트상품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조선 후기 남원 도자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마디로 일본이 조선 도자기 기술을 가꾸고 다듬어 국제적인 예술품, 문화상품으로 키운 겁니다. 조선정부는 무엇을 했습니까.’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요, 문화 경쟁력이 국력 국부가 되는 시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소해 보이는 꽹과리 음량, 도자기의 디자인 품질에서부터 경쟁력의 원천을 따지고 확보해 가야 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순수한 우리 것을 갈고 닦아 세계상품으로 끌어올리는 데 더 투철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 영화에서도 흥행 대작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국제영화제에서의 반응과 평판은 ‘아직’이다. 중국의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이 내놓은‘붉은 수수밭’‘홍등’,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가 만든 ‘라쇼몽’같은 작품에 필적할 게 아직 없다. 그들은 가장 중국적이고 지극히 일본적인 소재를 통해 세계인의 보편적인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것을 국제성으로 담아내는 역량이 못미치는 것이다. 지역성 토속성이 강한 작품들은, 그 어설픈 기법이나 서툰 접근, 허술한 완성도 때문에 세계 영화팬들의 공명(共鳴)을 얻는 데 실패했다.
▼역사성 새기고 상품성 덧칠▼
미술이라고 다를 바 없다. 일본의 그림은 벌써 100년 전부터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할 정도로 나름의 국제성을 보여주었다. 중국화는 프랑스 현대화랑미술제(FIAC)같은 데서 당당한 평가를 받고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국화는 어정쩡한 절충양식에 빠져 세계미술시장에서 자리매김조차 불분명한 상태 아닌가.
‘일본인’ 심수관씨는 지난해 ‘남원의 불’을 가고시마로 실어가는 흥행력을 보여주었다. 조상들이 처음 왜병에 체포되어 끌려갔던 그 가마터의 사소한 ‘불씨’를 채화해 상품화하는 아이디어를 과시했다. 그렇게 사쓰마 도자기에 역사성을 새기고 상품성을 덧칠하는 것이다. 8월이면 경기 이천시에서 세계도자기 엑스포가 열린다. 월드컵축구대회도 1년을 남겨두고 있다. 한국 문화 경쟁력의 시험대가 아닐 수 없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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