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제1회 우루과이
“학기말 시험보러 가야겠는데요.” 월드컵 경기 도중 선수가 시험이 있어 집에 가야겠다고 하면 얼마나 황당할까. 그렇지만 월드컵 첫 대회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 첫판에서 프랑스에 1-0으로 힘겹게 이긴 아르헨티나. 그런데 팀의 간판 골잡이인 파레이라가 대학 학기말 시험이 있다며 귀국하고 만 것. 대타로 긴급수혈된 18세의 ‘고교스타’ 스타빌레. 그는 멕시코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월드컵 최초의 해트트릭을 세우는 등 4경기에서 8골을 터뜨리며 월드컵 첫 득점왕에 등극하는 신화를 만들었다.
▼1950년 제4회 브라질
6월28일. 미국의 각 신문사에서는 브라질 벨로 리존테에서 텔렉스를 통해 들어오는 전문을 보고 탄성이 터져나왔다. 신문사 관계자들은 “미국, 잉글랜드 1-0으로 격파”라는 내용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것. 잉글랜드는 당시 세계 최강으로 미국이 이길 수 없다고 여겼던 상대. 그러나 미국은 분명 잉글랜드를 1-0으로 꺾었다. 그러나 몇몇 신문중에는 통신 내용이 틀린 것으로 자의적으로 판단해 다음날짜 신문에 이렇게 오보를 내보냈다. “잉글랜드, 미국을 1-0으로 눌렀다.”
▼1954년 제5회 스위스
‘축구야, 격투기야.’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헝가리-브라질의 8강전. 헝가리의 주장 히데구티는 슈팅을 하고 볼이 골인되는 것을 확인하고 막 환호성을 올리려는 순간 아랫도리가 허전한 것을 느꼈다. 브라질 수비수가 팬츠를 잡아당겨 ‘못보여줄 것’을 보여주고 만 것. 이 때문에 양팀 선수간에 실랑이가 벌어졌고 결국 주먹다짐이 오갔다. 격투기 끝에 헝가리의 4-2 승리.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라커룸에서 승리의 기쁨에 들떠있던 헝가리 선수들을 브라질 선수들이 급습해 다시한번 혈투를 벌여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베른의 난투극’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1966년 제8회 잉글랜드
최초의 월드컵 트로피는 대회의 창시자인 프랑스인 쥘리메의 이름을 따 쥘리메컵으로 불렸고 높이 30㎝, 무게 1.8㎏의 승리의 여신이 조각된 컵. 쥘리메컵이 잉글랜드월드컵 개막을 1주일 앞두고 런던 웨스트민스터사원 센트럴홀에서 전시되고 있던 도중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의 전 경찰력이 동원되어 수색 작업을 벌이던 중 런던 근교 노드의 산속에 사는 농부 코베트의 집 뒤뜰에서 발견돼 극적으로 대회 개막에 맞출 수 있었다. 1970년 브라질이 월드컵 3회 우승을 이룩함으로써 브라질이 영구 보유하게 된 쥘리메컵은 브라질에서 또다시 도난당해 현재까지 종적이 묘연하다.
▼1978년 제11회 아르헨티나
악명높은 군사정권이 지배를 하고 있던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월드컵. 전세계가 월드컵의 개최지로 아르헨티나가 결정된 데 반대하는 가운데 우여곡절 끝에 대회가 열리게 됐다. 개막을 1주일 앞둔 1978년 5월25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설치된 프레스센터에서 엄청난 폭음이 일어났다. 세계 각국에서 월드컵을 취재하기 위해 몰려든 기자들이 운집한 프레스센터에서 폭탄이 폭발한 것. 사전 제보로 작은 사고에 그쳤지만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에 적대적이었던 기자들을 겁주기 위한 자작극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1986년 제13회 멕시코
아르헨티나-잉글랜드의 8강전. 아르헨티나 발다노가 잉글랜드 문전을 향해 높게 볼을 올린 순간 문전에서는 1m81의 잉글랜드 장신 골키퍼 실턴과 1m66의 아르헨티나 단신 골게터 마라도나가 공을 향해 동시에 떠올랐다. 둘의 신장차는 무려 15㎝. 여기에 실튼은 손을 뻗은 상태여서 50㎝가 넘는 차이가 났지만 볼은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라도나의 화려한 골세리머니에 관중은 환호로 답했지만 TV로 정밀 분석한 결과 볼은 마라도나가 머리 위로 살짝 손을 들어 처넣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한 마라도나의 해명이 걸작이었다. “신의 손이 볼을 때렸다. 볼을 가격한 왼손은 나의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었다.”
<권순일기자>stt7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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