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이래서 명작]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 입력 2001년 5월 30일 19시 19분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 토마스 만의 정치관

20세기 전환기의 시대적 갈등이 토마스 만의 내면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초기의 그의 정치적 견해는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의해 비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가 작가로는 위대함을 인정받고 있지만 그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는 상반된 입장이었다.

독일에서 토마스 만 만큼 이중적 평가를 받는 작가도 드물다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벌써 1920년대부터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시대는 그를 침묵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1914년 8월 1일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토마스 만은 경악과 희망이 섞인 감정으로 전쟁을 맞이했다. 그는 8월 7일 형 하인리히 만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전쟁을 예견했다.

"이 전쟁으로 내 생활의 물질적 기반이 완전히 변화될 것 같아요. 전혀 예기치 않게 아주 엄청난 일을 체험할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닌가요?"

이때부터 정지적이고 급진적인 성향이 강한 형과 불화를 빚게 됐다. 더 나아가서 그는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존재와 교양을 대부분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독일문화와 전통에 대한 매도며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치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형이 독일 문화를 매도하는 데 대해 독일문화의 정신적 아들로서 독일의 명예를 위해 정신적인 격투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집필 중이던 《마의 산》을 중단하고 국수주의적 입장에서 독일과 자신을 해명하고 정당화하고자 2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쓴 토마스 만의 에세이집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을 출간하게 됐다.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은 국가와 정치에 대한 정신의 자율성의 주장이고 예술과 대중간의 경계를 짓는 것이며 정치적인 것을 중시하지 않는 심미주의에의 자기고백인 것이다. 시민계층을 보호하고 그것의 순수성, 위엄 및 휴머니즘을 보존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지만 그는 독일 시민이 부르조아로 발전한 사실을 놓쳐 버렸다고 고백하고 있다. 독일 시민과 그의 교양 개념을 명예 회복하려는 자신의 의도가 너무 늦었음을 그는 아쉬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한 일을 시도한다. 시민을 민주적 물결에 내맡기기에는 무시 못할 정도로 교양 개념이 시민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민주적인 문학이 밀어닥침으로써 휴머니즘 자체가 위협받는다고 여긴 것이다.

◇ 세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인 토마스 만

그는 뤼벡에서 부유한 곡물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 참사위원을 지내다가 부시장이 된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남미 출신의 미인으로서 음악적 재능이 풍부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는 시민적 기질을, 어머니에게서는 예술가적 기질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학교를 싫어했었다.

16세 때 아버지가 죽자 백 년 동안 이어왔던 만(Mann)상회(商會)가 파산하고 어머니와 같이 뮌헨으로 이주했다. 거기서 그는 화재보험회사의 견습 사원으로 있으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후 로마에 체재하던 형의 권유로 이탈리아에서 일 년 동안 살게 됐다. 그 동안 뮌헨 시절 이후의 단편을 모아 《작은 프리데만 씨 Der kleine Herr Friedemann》라는 표제로 출판했다. 이 시절의 단편들은 병자, 불구자 혹은 정신적인 결함이 있는 인물들이 시민적인 행복을 혹은 정신적인 세계의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파멸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 많다.

1899년 그는 뮌헨으로 돌아와 잠시동안 주간잡지 《짐플리치스무스 Simplicissimus》의 편집을 담당했고, 1900년에는 장편소설 《부덴브로크가(家)의 사람들 Buddenbrooks》을 완성했다. 이것은 일가 4대에 걸친 몰락의 역사를 그린 것인데, 만(Mann)의 이름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1905년에 그는 대학교수의 딸과 결혼하여 명성도 있고 해서 자유문필가로 생활했다. 이 무렵에 명작인 《토니오 크뢰거 Tonio Kr ger》, 《대공전하(大公殿下)》, 《베니스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 등이 발표됐다.

1912년 부인의 폐병으로 스위스의 다보스 요양소에 들어갔을 때, 그는 동반자로 따라가 거기서 한 달 동안 머물렀다. 그때의 체험을 삽화로 모으려고 했는데, 그것이 점점 방대해서 12년 후에 완성된 것이 소위 그의 문학의 정점을 이루는 《마(魔)의 산 Der Zauberberg》이다.

1929년에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점차로 태두되어 가는 나치의 위협을 느낀 그는 먼저 나치를 희화한 《마리오와 마술사 Mario und der Zauberer》를 발표했고, 이어 강연을 통해 나치의 위협성을 경고했다. 1938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그는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교수가 되어 강연 혹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인류의 적 나치 타도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바이마르의 로테 Lotte in Weimar》,《파우스투스 박사 Docktor Faustus》 등을 발표했고, 1944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세계주의자요 평화주의자인 그는 전후 점진하는 동서의 대립을 유화시키기 위해 동구의 동서 평화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미국이 반공 정책을 취하자 1952년에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동서로 분리된 조국으로는 돌아오지 않고 스위스에 살면서 세계 평화와 동·서독의 통일을 위해 강연 등으로 많은 활동을 하다가 1955년에 80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숨졌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크뢰거 가의 아들인 14세의 토니오는 시와 음악을 좋아하는 몽상적 소년이다. 그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활달한 미소년 한스 한젠을 이상형인 것처럼 좋아한다. 그러나 예술과는 인연이 멀고 전형적인 시민 기질을 지닌 한스는 토니오를 경멸하기만 한다. 16세가 된 토니오는 댄스 강습장에서 쾌활한 미소녀 잉에보르크 홀름 (Ingeborg Holm)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 마음을 두지만, 그녀도 한스와 같은 세계에 사는 인간으로 무기력하고 애정 표시도 제대로 못하는 토니오를 경멸한다.

아버지가 죽은 후 일가는 몰락하고 어머니는 재혼한다. 토니오는 작가가 되어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되었으나, 내적으로는 고뇌와 고독의 연속이다. 그는 늘 평범하고 건강한 시민 기질의 소유자에 대한 열등감과, 자기는 가장 인간적이고 건전한 것을 동경하고 있으나, 그것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면서 예술가의 고독과 고뇌를 맛보지 않을 수 없는 숙명의 자각 같은 것이 뒤얽혀 삶과 정신, 시민성과 예술성이라는 대립 명제에 대해 고뇌한다. 토니오는 뮌헨에서 알게 된 여류 화가 리자베타에게 자기의 고뇌를 털어놓았으나, 그녀는 그를 가리켜 길을 잘못 든 시민이라고 간단히 넘겨 버린다. 이처럼 현실 생활과 예술의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던 토니오는 모처럼 이름을 감추고 고향으로 찾아가는데…….

◇ 글쓴이 최가희

인하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석사과정중이다. 논문으로 [Lessing과 Hebbel의 시민비극 비교 연구 - 작품 《Emilia Galoti》와 《Maria Magdalena》을 중심으로]가 있다. 현재 자음과 모음 편집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북코스모스 가이드북 필자 E - mail : schein9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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