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나는 이름하여 ‘행복한 2등국가론’이란 걸 떠들어대다가 몇몇 독자들로부터 따끔한 충고를 들어야 했다. 국민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지식인으로서 어찌 그렇게 국민의 기를 꺾는 발언을 할 수 있느냐는 질책이었다. ‘어줍잖게 세계 초강대국이 되려고 미국이나 중국과 어깨를 겨루다 만신창이가 되어 거꾸러지느니보다 작지만 짭짤하고 삶의 질이 높은 2등국가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 아니냐’는 것이 내 생각인데 1등만을 추구하는 우리 문화가 용납하지 않는 것 같다.
나라가 2등을 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데 하물며 나 자신이 이인자가 되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름다운 ‘협력자 정신’을 발휘하여 이 세상을 훨씬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 행복한 이인자들이 수두룩하다. ‘위대한 이인자들’은 근대 인류사회를 이끈 화려한 일인자들 곁에 또는 뒤에 서 있었던 협력자 열 사람들의 품성과 업적을 흥미롭게 소개한다.
책에 따르면 위대한 이인자들은 대개 후진참모형, 현재 위치에 충실한 조연형, 그리고 승진가도형의 세 유형으로 나뉜다. 그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보좌하며 미국을 승전국으로 이끈 조지 마셜 같은 개혁가이자, 크라이슬러의 이튼 회장과 함께 파산 위기로부터 회사를 구해낸 로버트 러츠 같은 동맹자이며, 찰스 메릴을 도와 메릴 린치를 미국 제일의 금융기관으로 끌어올린 윈스롭 스미스 같은 특별한 동료들이다.
리더였던 사람이 최고의 위치를 넘겨준 경우도 있다. 자진하여 지휘관 역할을 젊은 마오쩌뚱에게 양도한 저우언라이가 대표적인 예다. 묵묵히 이인자의 자리를 지키다보면 일인자로 추대를 받는 경우도 있다. 마지막까지 이인자의 덕을 행하려했던 왕건이 결국 천하를 통일하게 되는 얘기는 한번쯤 되씹을만하다.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장 무의미한 직책’이라는 부통령직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클린턴을 역대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앨 고어가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은, 그것도 실제 득표수에서 이기고도 부시에게 대통령 자리를 양보해야 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애석하기 짝이 없다.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연주하기 힘든 악기는 제2바이올린이다”라는 번스타인의 말처럼 모두가 다 훌륭한 이인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키지 않는 이인자들은 종종 우울증이란 병을 얻고 만다. 하나밖에 없는 일인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만 일삼는 우리 정치인들 중에서 위대한 이인자들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최재천(서울대 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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