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규민/자식농사

  • 입력 2001년 6월 6일 19시 08분


오래 전 산업은행 총재를 지낸 어떤 이의 얘기다. 현직시절 아들이 대학시험에 떨어져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했는데 그날따라 자동차 문을 열어주는 현관 수위의 표정이 밝았다. 여느 때와 달리 총재실까지 따라오는 모습이 기이해서 슬그머니 비서관에게 물었더니 아들이 명문대 법과대학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그는 봉투에 장학금을 넣어 수위에게 전달하면서 “오늘은 자네가 총재”라고 축하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아이들을 일류대학에 보낸 것만 갖고 자식농사를 잘 지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5남매를 과외 한번 안 시키고 모두 명문대에 진학시켜 화제가 된 경북 구룡포마을의 농부 황보태조씨도 보통 복받은 아버지가 아니다. 황보씨가 올해 막내를 서울대 의과대학에 합격시킨 뒤 1남4녀를 키운 경험담을 쓴 ‘꿩새끼를 몰며 크는 아이들’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그 결과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는 자식농사를 풍년으로 거둔 순박한 농민이다.

▷반면 자신은 이름을 높였지만 자식 때문에 고통을 받은 위인들이 역사에는 수도 없이 등장한다. 부귀와 영화 그리고 지혜까지 한몸에 안았던 고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은 자식교육을 위해 성서의 잠언까지 썼지만 잘못 키운 바람둥이 아들 르호보암은 백성의 원성을 산 끝에 나라를 둘로 갈라지게 했다. 최근에는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의 딸이 미성년자 음주금지법을 어겨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아버지를 망신시켰다. 솔로몬도 바람둥이였고, 부시도 술을 좋아했다니 부모의 모습을 닮은 자식들만 나무라기도 어렵다는 생각이다.

▷최근 빚어진 네팔 왕실의 비극도 자식농사를 잘못 지은 결과라고 하겠다. 왕실 일가족 8명이 총격을 당해 비운의 삶을 마감한 것도 그렇지만 도대체 누가 왜 총을 쏘았는지 사건의 전말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나라 전체가 의혹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로 혼란에 빠진 것도 안쓰럽다. 죽은 부왕의 동생이 왕좌에 앉았지만 만일 그가 의혹의 중심인물이라면 이 나라 왕실의 자식농사는 그런 낭패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권세 큰 왕실이라 해도 부모형제간에 총질을 하는 집안이라면 초가삼간 범부의 가정만 하겠는가.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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