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동진]블레어의 리더십 부럽다

  • 입력 2001년 6월 10일 19시 14분


7일 실시된 영국의 총선거는 결과가 너무나 뻔하게 예측되어 왔기 때문에 그다지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영국 총선의 결과는 확고한 신념과 비전에 충실한 한 젊은 정치 지도자가 당내 파벌이나 불만세력에 흔들림없이 꿋꿋하고 일관성 있는 지도력을 발휘함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 주었다.

역사상 최연소 노동당수로서 전후 최대 의석수의 승리를 쟁취하는 기록을 세우며 97년 총리직에 오른 토니 블레어는 이번에 다시 노동당 최초의 연속 2기 집권이라는 기록을 추가하였다. 그러나 이번 총선의 대승은 야당의 내부 갈등이나 전략 미숙, 또는 야당 지도력의 약화 때문에 얻어진 어부지리는 아니다.

그는 불과 43세의 젊은 나이로 94년 노동당 당수직에 오르자마자 바로 노동당의 대개혁에 착수하였다. 노동당은 1896년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단체를 모체로 하여 창당되었으며 따라서 그 이래 꾸준히 이어온 노조의 막강한 영향력과 사회주의 이념을 과감하게 탈피하는 것이 이반된 민심을 되돌리는 데 반드시 필요했다. 이것은 100년간 노조의 아성이었던 노동당에서 웬만한 신념과 용기로는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블레어는 당내의 뿌리깊은 정통 이념론자와 노조의 반대를 극복하고 ‘신노동당’의 기치를 높이 들었으며, 그럼으로써 사회주의적 이념정당의 구각(舊殼)을 벗어버리는 일대 변신을 주도했다.

‘신노동당’의 정책기조를 흔히 ‘제3의 길’이라고 말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토니 블레어에 의한 노동당의 변신은 사회주의와 자유시장 경제 정책의 절충이 아니라 ‘탈이념 국민정당화’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신노동당은 97년 총선에서 노조의 과도한 활동을 철저히 규제한 보수당 정부의 조치들을 그대로 계승한다고 공약하였으며 나아가 규제 철폐와 시장 자유 기능 확대 등 보수당보다도 오히려 더 ‘대처리즘(Thatcherism)’적인 색채를 표방함으로써 전통적으로 보수당 지지 기반인 중산층을 끌어안을 수 있었고 그것이 보수당 18년 장기 집권의 벽을 무너뜨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때 노조측의 반발 기미가 보이자 블레어는 대담하게도 노조와의 관계 단절 불사를 시사하기도 하였다. 대단히 과감하고 용기 있는 리더십의 발휘였다. 과거 노동당 정부 시절 다우닝가 10번지(총리 관저)의 실제 주인은 노조총연맹(TUC) 의장이라고 했을 정도로 막강했던 노조의 영향력을 ‘신노동당’ 정부에서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대담한 의지의 표시였다.

이번 총선에서 보수당은 감세 정책을 표방하면서 노동당의 사회주의적 증세 정책 가능성을 부각시키는 이른바 이념 쟁점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전략은 윌리엄 헤이그 보수당 당수가 중산층의 정서를 제대로 읽지 못한 데서 온 전략 미숙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4년간 토니 블레어 정부는 영국을 유럽연합(EU)의 으뜸가는 투자 대상국으로 만들었다.

이를 가능케 한 노동시장의 탄력성을 신노동당 정부가 결코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 또한 설사 세금을 늘리더라도 의료, 교육, 공공서비스의 개선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신뢰감을 기업가와 중산층에게 확고하게 심어 주는 데 성공했다.

현재의 영국 경제의 호조는 보수당 정부 때 기반이 다져진 것이지만 블레어의 신노동당 정부가 기반을 더욱 강화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세계적으로 권위가 인정된 ‘더 타임스’는 창간(1785년) 이래 210년 이상 지켜온 전통을 깨고 노동당 지지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번 총선의 결과는 일찍부터 노동당의 압승이 예상되었으며 이것은 정치지도자가 당내에서보다는 국민으로부터 박수를 받겠다는 일념으로 당내 비판세력의 눈치를 보는 일 없이 강단있고 일관되게 밀고 나간 리더십 발휘의 소산이었다.

리더십의 비전이나 신념, 용기도 없이 기회만 있으면 대권, 정권 재창출을 되뇌는 국내의 정치 현실에서 영국 정치는 타산지석이 될 수 없는 그저 먼 나라의 꿈같은 일로만 보아야 할 것인가.

최동진(인제대 석좌교수·전 주영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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