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대답했다. “행정업무 처리와 정책수립에는 잘 맞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일이 많은데 이 경우에는 영 맞지 않습니다. 행정은 ‘전문성’인데 정치는 ‘술수’입니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정치도 전문성이 강조됩니다.”
동아일보는 최근 행정고시 출신 중앙부처 30대 공무원을 대상으로 의식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대상자의 과반수가 전직을 꿈꾸고 있었고 절반이 공직 수행의 가장 큰 걸림돌로 정치권의 정치적 목적을 꼽았다.
주택정책 방향을 놓고 건설교통부 공무원 사이에 오랜 갑론을박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주택건설 부문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다. 그러나 갑자기 정치권에서 주택경기 부양을 들고 나왔다. 공무원들은 허겁지겁 정책을 입안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건설경기 붐을 통해 뿌려지는 돈은 밑바닥을 상대로 하는 탓에 선거에 바로 효과가 있다’는 숨은 의도는 각자의 마음속에 접어 두었다. 정치적 결정에 맞는 형식논리 개발이 그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공무원 사회에서는 “이미 군불을 때기 시작했다”며 적어도 5년 만에 한번씩 시달려야 하는 ‘악몽’을 떠올렸다. 전문성에 바탕한 합의는 ‘술수’ 앞에 무력했다.
교육행정의 책임자가 한 고교에 갔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한 여학생이 거침없이 섹스문제가 가장 큰 고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교실 붕괴’를 꼽았습니다. 마음은 학원에 가 있기 때문에 ‘마음의 붕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그는 또 “미국 대학 1학년생의 진급률은 60%대인데 서울대에서 몇명 유급했다고 시끄러운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대학에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당연한 말을 강조했다. 며칠 뒤 교육부가 ‘이적단체’인 한총련 수배 학생들의 명단(검찰 작성)을 각 대학에 통보하고 지도를 요청한 데 대해 그는 ‘국민의 정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진노’했고 관련 공무원에 대한 문책을 시사했다. 교육현장에서 ‘마음의 붕괴’를 읽고 대학의 면학분위기 조성을 역설하던 모습과는 달라진 정치적 태도였다.
의약분업 실패 및 건강보험 파탄과 관련해 감사원이 보건복지부에 ‘허위 축소 보고’ 등을 이유로 실무자 징계를 요구했다. 의약분업은 범정치권 개혁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공무원들은 크게 반발했다. 설령 ‘허위 축소 보고’라 하더라도 정치적 목적의 틀 속에 갇힌 공무원들이 위에서 듣기 싫어하는 내용을 ‘체계적으로’ 빼거나 약하게 보고할 수밖에 없도록 분위기가 유도됐다는 분석이 오히려 설득력을 갖는다. 전문성이 정치의 시녀가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한 중견공무원이 말했다. “북한상선의 영해와 NLL 침범에 대한 대응은 국토방위의 ‘원칙’과 ‘전문성’의 문제인데도 정치논리가 앞섰습니다. 군이 정치논리에 헷갈리면 누가 어떻게 싸움을 하겠습니까. 이번에도 여론이 불리해지면 영해 침범 상황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고 군 실무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겁니까.”
앞의 학자 출신 고위공무원과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술수’도 정치학의 한 장르로 다뤄 현실과의 괴리를 좁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우리 풍토에서 그러한 ‘전문성’이 용납될지 모르겠습니다.”
hp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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