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편의 시편은 진신사리 같은 순도 높은 정제미를 보여준다. 한 페이지가 넘치는 시편은 하나도 없고, 대신 석 줄짜리 단형시가 있다. ‘시(詩)의 청빈정신’ 이라 할까.
함께 묶인 97년 ‘시와시학상’ 수상소감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피곤하다. 일상에서도 그러하고 시에서도 그러하다”.
내용에서도 ‘저문 강에 삽을 씻고’(1978)에서 보여졌던 민중시인의 면모는 찾기 힘들다. 다만 달라진 것 없는 세상에 대한 회한이 희미한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
‘세상이 달라졌다 /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 /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세상이 달라졌다’ 중)
‘미움의 언어’를 삭히고, 또 삭혀서 서정을 회복하려 한다. 막 시를 배우는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제 내 시에 쓰인 / 봄이니 겨울이니 / 하는 말로 시대 상황을 연상치 마라 / 내 이미 세월을 잊은 지 오래 / 세상은 망해가는데 /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봄소식’ 중)
초발심으로 그가 찾아낸 것은 ‘사랑’이다. 첫사랑의 고백처럼 수줍게 노래하는 ‘사랑’이다. 그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은 자연을 향한다.
‘사랑해 // 때늦게 싹이 튼 이 말이 / 어쩌면 / 그대로 나도 모를 / 다른 세상에선 꽃을 피울까 몰라 / 아픈 꽃을 피울까 몰라’(‘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중)
무엇보다 이 시집의 결정(結晶)은 묵언(默言)의 경지를 향한 구도자의 면모다. 이는 말과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려는 한 시인의 치열한 안간힘일 것이다. 발문을 쓴 시인 고은의 지적처럼, 이것이 ‘시(詩)와 선(禪)의 영역’을 넘나들며 다음과 같은 절창을 만든다.
‘그대, 알알이 고운 시 이삭 물고 와 / 잠결에 떨구고 가는 새벽 / 푸드덕 / 새 소리에 놀란 나뭇잎 / 이슬을 털고 / 빛무리에 싸여 눈뜬 / 내 이마 서늘하다’(‘시가 오는 새벽’중)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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