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대중문화 째려보기]내게 너무 이쁜 그녀, 하리수

  • 입력 2001년 6월 15일 12시 45분


컬트트리플 4.5집의 타이틀곡 '아침'을 들어보셨나요? 예전의 떠들썩함과 치기는 사라지고 세련된 선율과 맑고 담백한 목소리가 귀에 쏙 들어옵니다. 개그맨들이 음반도 내는 게 아니라 정말 가수로서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늦잠을 자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종강에 즈음하여 술자리가 이어지고, 문학에 대해 영화에 대해 대중음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감당할 수 있는 주량을 넘기기가 십상입니다. 쓰린 위를 쓸면서 케이블TV를 켭니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자정이 넘어서 귀가한 후에도 뮤직채널을 시청했던가 봅니다.

먼저 감미로운 전주가 흐릅니다. 그녀는 틀림없이 저를 보고 있습니다. 젖가슴 바로 위의 흰 살들, 약간 넓은 듯 하면서도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는 어깨, 동그란 입술, 오뚝한 코, 큰 눈, 짙은 눈썹. 그리고 무엇보다도 긴 생머리가 수면 위에서 찰랑거립니다.

그녀는 지금 가슴까지 차 오른 물 속에 서서(앉았을 수도 있습니다. 허나 가슴 아래는 카메라가 잡아주지 않으니 알 수가 없네요), 무표정한 얼굴로 저만을 보고 있습니다.

여인의 눈빛을 정면에서 받아본 적이 언제였던가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가면을 쓴다는 것이고 상대를 노려보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만큼 상대로부터도 직접적인 시선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헌데 그녀는 터놓고 모든 걸 이야기해보자는 식으로 노려봅니다. 무엇이 그녀를 저렇듯 도전적이게 만들었을까요?

물이 어깨까지 차오릅니다. 그녀는 찬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입술도 떨리지 않고 눈도 아주 가끔씩 깜박일 뿐입니다. 저는 저런 무표정이 두렵습니다. 웃거나 울면 거기에 맞추어 처신할 수 있겠지만, 표정 없음은 곧이어 벌어질 일들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드니까요. 그녀는 울까요 아니면 웃을까요? 그녀가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눈물을 떨구는 여인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까요.

아,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갑니다. 물이 턱까지 차 오르고 머리칼이 물 속에서 해초처럼 흔들립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반쯤 열리면서 새하얀 치아가 보입니다. 너무 커서 오히려 두려웠던 눈도 조금씩 작아지면서 웃음을 자아냅니다. 저를 향해 그렇게 웃어주었던 여인과 또 그 웃음 속에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나도 그때 저렇게 웃음으로 화답했던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물이 점점 더 차 오릅니다. 그녀의 웃음꽃은 더욱 활짝 피어납니다. 콧등이 물에 잠기자 작은 물방울들이 만들어집니다. 그녀는 살아 있습니다. 걱정과 함께 호기심이 생깁니다. 눈썹까지 물이 차도 웃을까?

생머리가 모두 잠겼습니다. 눈이 조금 작아졌지만, 그래도 그녀는 저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웃고 있습니다. 수면 아래에서 웃는 그녀. 고통스러울 텐데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저만을 위한 작은 선물인 것도 같고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을 만큼 행복한 아침이라는 자기 표현인 것도 같습니다.

아, 그 상태에서 노래가 끝나는군요. 수중에서 웃던 그녀도 다른 장면 뒤로 사라졌습니다. 그제야 그녀의 이름 석 자가 떠올랐습니다. 하리수. 내게 너무 이쁜 그녀.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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