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One Shining Season

  • 입력 2001년 6월 19일 16시 39분


프로야구를 보다 보면 혜성처럼 등장해서 기존의 스타 플레이어들 못지 않은 훌륭한 기량으로 즐거움을 선사하는 선수들이 있다. 뜻밖의 선수일수록 즐거움은 배가되며, 프로야구 팬들은 이러한 선수들이 오랜 기간 동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쉽사리 팬들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경우가 많아 아쉬울 때가 있다. 미국에서 출판된 『One Shining Season』이라는 책에는 이렇게 기억에서 사라져간 메이저리거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한국판 『One Shining Season』을 써보는 것은 어떨까.

▼1995 이용호▼

1993년 건국대를 졸업하고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한 이용호는 1995 시즌에 이르러 최고 셋업맨으로 자리매김하며, 소속팀 베어스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3승 5패 10세이브, 방어율 1.95는 이용호의 활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40 중반에 이르는 묵직한 직구와 스플리터가 주무기였으며, 101 2/3 이닝 동안 피안타가 58개에 불과할 정도로 위력적인 구위를 자랑했다. 하지만 이용호에 대한 감독의 믿음은 혹사로 이어졌고, 혹사는 이미 부상 전력이 있는 팔꿈치와 어깨 부상으로 이어졌다. 결국 현역으로 입대하기까지 1996, 97 두 시즌 동안 52 1/3 이닝을 투구하며, 3승 1패 1세이브, 방어율 5.33으로 부진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지난 2000 시즌에 복귀했지만, 아직까지 부상과 군 복무로 인한 공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1994 인현배▼

지난 1994 시즌에 데뷔한 인현배는 124 2/3이닝을 투구하며, 10승 5패, 방어율 4.19의 성적을 거두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후 지금까지 20이닝 이상 투구한 시즌이 단 한 차례도 없을 정도로 부상과 부진의 연속이었다. 루키 시즌에 당당히 10승 투수 대열에 합류하며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10승은 순전히 뛰어난 타자들 덕분이라는 비아냥도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9승(1패)을 거두는 동안 인현배의 방어율은 2.64에 불과했으며, 1994 시즌에 거둔 두 번의 완봉승 가운데에는 선동렬과의 맞대결에서 거둔 1승이 포함되어 있다.

▼1998 최원호▼

1998 최원호는 1998 챔프 유니콘스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하며, 선발 전원 10승의 위업을 달성해냈다. 투구이닝 151이닝, 10승 5패 1세이브, 방어율 3.04의 성적은 유니콘스가 아니었다면 에이스로도 모자라지 않는 성적이었으며, 25살의 나이를 감안하면 차세대 에이스라는 기대도 결코 허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방어율이 무려 6점대로 치솟으며 부진에 빠져, 결국 심재학과 트레이드되어 트윈스에서 뛰고 있다.

한 야구 팬은 최원호-심재학 트레이드를 ‘유니콘스의 한판승’이라 평가했지만, 트윈스로서도 결코 손해라고 할 수 만은 없다. 왜냐하면 트윈스가 최원호를 얻기 위해 포기한 선수는 ‘투수’ 심재학이었으니까. ‘바보짓’은 따로 있었다.

과감한 정면 승부 보다는 지나치게 코너웍에 의존하려는 성향이 항상 최원호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며, 투수에게 유리한 잠실 구장에서 이러한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많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1992 임형석▼

베어스의 3년차 내야수 임형석은 1999시즌 이전까지 가장 극심한 타고투저 시즌으로 기억되는 1992시즌을 맞이하여 자신의 기량을 활짝 꽃피웠다. 1990, 91 각각 4개, 6개에 불과하던 홈런은 무려 26개로 늘어났으며, 타율 역시 이전 시즌의 2할3푼9리에서 2할9푼으로 껑충 뛰었다. 특히 26개의 홈런은 장종훈(41), 김기태(31)에 이어 리그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으며, 1998 우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타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홈런을 때려낸 선수로 남아 있었다. 1992년 8월 23일, 대 자이언츠전에서 기록한 싸이클링 히트는 임형석의 진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하지만 이후 손가락 부상과 수비 불안으로 인한 포지션 문제 등으로 부진을 거듭하다, 결국 방출되는 수모를 겪었다. 자이언츠에서 다시 재기를 노렸지만, 타율 0.210, 홈런 1개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8년간의 프로 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생애 두 번째로 많은 홈런을 때려낸 1991, 94시즌의 홈런 개수가 각각 6개일 정도로 기복이 심한 선수 생활이었지만, 세련되지 못한 선구안에는 기복이 없었다. 삼진보다 많은 볼넷을 얻어낸 시즌이 단 한 차례도 없었으며, 40개 이상의 볼넷을 얻어낸 적 역시 없다. 선구안이 부정확한 타자는 오랜 기간 동안 좋은 성적을 유지할 가능성이 낮다. 아울러 손가락 부상과 포지션 문제는 선구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시간을 빼았아 갔으며, 결국 타자로서 대성하는 데 실패했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