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부시 미 정부의 대화 제의에 대해 ‘경수로 제공 지연에 따른 전력 보상’을 협상의 우선 의제로 채택할 것을 제안했다.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을 주시하던 평양의 ‘제갈공명’이 미국을 상대로 승부수를 띄운 셈이다. 그동안 북한은 자국에 유리한 협상 의제를 새로 만들어 협상력을 강화하곤 했는데,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요구에 대응해 NPT 탈퇴 선언을 우선적인 협상 의제로 만든 게 대표적인 예다.
▷이제 북한이 들고 나온 전력보상 문제를 받아들일 것이냐 여부를 놓고 미국과 우리 사회에서 여론이 갈라질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상반된 주장이 나오는 배경은 경수로 공사의 지연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평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엔 당연히 북한쪽 책임이 크다. 일례로 북한은 경수로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북측 노동자의 임금을 110달러에서 600달러로 올려달라고 고집을 부리면서 작년 4월부터 일부 노동자를 철수시켰고, 이 때문에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중앙아시아에서 근로자를 공수해와야 했다.
▷미국의 유명한 국제협상 이론가인 프레드 이클리는 ‘미국이 공산주의자와 협상하면서 보여준 최대의 잘못은 공산주의자들이 협상 의제를 정하도록 내버려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엔 양상이 좀 다른 것 같다. 미국이 먼저 핵·미사일·재래식 무기 등 협상 의제를 제시했고, 전력보상 문제는 북한이 이에 대응해서 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평양의 제갈공명도 지금쯤 꽤나 고민스러울 게 분명하다.
김용호 객원논설위원(한림대 교수·정치학)
kimyh@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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