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인터넷과 30년전 노트

  • 입력 2001년 6월 20일 18시 51분


요즘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에 대한 국민 지지도는 여전히 20%대에 머무르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큰 업적인 6·15선언 1주년도 썰렁하게 보낸 김 대통령의 마음이 얼마나 씁쓸했겠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한 김 대통령의 공적은 남북정상회담말고도 노벨평화상 수상을 비롯해 여럿 있지만 벌써 빛이 많이 바래 누구도 되돌아보려 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DJ정권이 이론의 여지없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업적이 하나 있다. 정보화 사업의 성공이 그것이다. 정보화의 척도라 할 수 있는 초고속 인터넷 이용률이 단연 세계 1등이다. 엊그제 프랑스 파리에서 들어온 외신은 ‘초고속 인터넷의 세계챔피언은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한국’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5월10일자로 나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광대역(廣帶域) 통신망 현황’ 보고서를 보면 1위인 우리나라의 초고속인터넷 이용률이 작년 말 현재 100명당 9.2명인데 비해 2위 캐나다가 3.91명, 3위 미국이 2.25명이다. 일본은 0.5명으로 11위에 머물고 있다. 5월3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T)은 한국은 인터넷 사용의 양과 질에서 모두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우리가 맞고 있는 21세기에는, 얼마 전 우리나라에 왔던 앨빈 토플러 박사의 말처럼 정보기술(IT)과 바이오기술(BT)의 융합이 거대한 변화를 몰고 올 것이 틀림없다.

정보화는 투명화다. 민원업무를 비롯한 행정 조달체계에 정보화가 시급한 이유도 바로 투명행정을 위해서다. 모든 게 투명해지면 부정과 비리가 끼어들 수 없다. 무엇보다도 투명성이 요구되는 곳이 우리 정치다. 정치자금의 흐름, 정책결정과정이나 인사의 투명성 확보가 정치개혁의 핵심이다.

그런데 정보화는 나는데 정치는 기고 있다. 왜 그럴까.

아이슈타인도 “정치가 물리학보다 힘들다”고 했다고 한다.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이 자연의 질서를 다루는 것이라면, 정치는 인간의 질서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렇다해도 우리의 경우 앞서가는 정보화와 여전히 후진적인 정치현실이 너무도 대조적이다.

얼마 전 김 대통령은 10년 전, 20년 전 노트로 강의하는 교수들은 퇴출되는 게 마땅하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우리 정치판이 30년 전 노트를 쓰고 있다는 게 옳을지 모른다. ‘제왕적 대통령’ ‘제왕적 총재’의 위엄은 아직도 대단하다. 크고 작은 인사에 ‘자기 동네 동지’를 챙기는 ‘부통령’이 있다는 소문은 이미 예사로운 얘기로 넘겨버릴 단계가 아니라고 한다.

정치지도자라는 사람들 중에는 지신(地神)을 섬기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조상의 묘를 이른바 왕기(王氣)가 서려 있는 명당을 찾아 이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울의 어떤 동네 지세(地勢)가 정치인들한테는 좋지 않다 하여 그곳을 떠난다는 ‘실세’ 정치인도 있다고 한다. 다음 대권후보는 반드시 특정지역 출신이어야 한다는 어이없는 소리를 정당의 대표라는 사람이 거리낌없이 하는 수준의 정치다.

정치가 제대로 풀리지 않으니까 DJ의 여러 업적마저 빛을 잃고 있다. DJ가 이미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은 IMF위기 극복, 6·15선언, 노벨평화상 수상에 정보화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짓는다면 후세에서 크게 평가받을 것이다. 어쩌면 정보화사업이 가장 알맹이 있는 실적으로 기록될지 모른다.

위에 말한 업적에 덧붙여 다음 대권이 어느 정당의 후보에게 넘어가건 공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바통터치를 해주면 DJ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DJ로서는 자신의 임기 동안에 뭔가 더 큰 것을 이루려고 욕심을 내지 않아도 좋을 듯 싶다. 욕심을 내지 않으려면 주변에서 욕심을 내도록 부채질하는 사람들을 물리쳐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민주당 소장 개혁파 의원들이 계속 목소리를 높이는 인적쇄신의 핵심일 것이다. 가뭄도 끝났다.

<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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