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한켠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어디선가 이런 기사를 읽고, 난 이름도 모르는 그 영화 감독을 생각하며 수치심과 함께 분노를 느낀다. 몇 년 전 뤽 베송의 영화 ‘제5원소’의 개봉 때 망신살을 기억하시는지. 오만한 거물 감독을 모셔다 놓고 떡 하니 잘려진 영화를 틀었던 수입사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가버린 그에게 거의 읍소했었다.
한 일년쯤 지나서 그가 제작에 깊이 간여했던 ‘택시’에는 놀랄 만한 장면이 나온다.
프랑스 건달 주인공들이 수상한 택시 한 대를 감시한다. 새벽녘 골목에 차를 세우고 내린 동양인 운전사가 트렁크 안의 다른 동양인 친구와 교대를 하고 트렁크로 들어가 잠을 잔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친구에게 프랑스 건달이 얘기한다. “응, 쟤들, 한국인이야. 저렇게들 먹고 살지…” 수치심에 이어 분노가 치미신다고? 누구에게? 뤽 베송에게? 아니면 우리 자신에게?
그보다 몇 년 전에는 한국인을 비하하는 내용이 있다며 무슨 사회 단체에서 미국영화 ‘폴링 다운’의 개봉을 천박한 반미감정을 팔아가며 저지한 적이 있다.
문제의 장면은 이런 거다. 되는 일 없어 열이 머리끝까지 받친 백인이 구멍가게에 들어가 동전을 바꾸려 한다. 마침 주인은 한국인이고, 그 한국인 주인은 뭔가를 사지 않으면 동전을 바꿔줄 수 없다고 못 되게 군다. 분노가 폭발한 주인공이 그 가게를 다 부신다.
뭘 사지 않으면 동전을 바꿔주지 못하겠다는 태도와 이런 장면을 반미에 연결시키면서 사회운동이랍시고 수선을 떠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저열한가? 혹은 한국인다운가? 참고로 난 요새도 시내에서 동전이 필요할 경우 껌을 산다.
영화에 관한 한 표현의 자유는 상처투성이다. 갖가지 걱정을 가진 별별 사람들이 가위질을 하지 못해 안달이다. 좋다. 비교적 개방적이라 할 수 있는 나 같은 젊은 감독의 뜻대로 이 문제가 쉽게 빠른 시간 내에 해결되리라고 기대하진 않겠다.
다만 그저 잘리지 않은, 온전한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는 이 소박하고 정중한 욕구에 대해서도 한번쯤 신중히 생각해 보시라.
이런 풍경들 속에서 나는 어떤 삶의 태도를 본다. 자신의 소소한 이익이나 명분 또는 만족을 위해선 남의 영화 따윈 좀 잘라내도 상관이 없다는, 그리하여 비디오 라이브러리에서 고른 많은 문제작들이 온전한 것이 아니어도 그게 무슨 대수랴, 하는 태도.
그건 자신의 소소한 이익이나 게으름 또는 관행 때문에 한강 다리를 엉터리로 지은, 그리하여 백주에 다리가 무너지고 사람이 죽어도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곧 잊어버리고 마는 삶의 태도와 얼마나 다른가?
<영화감독>
namu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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