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대중문화 째려보기] '미안해요' 라고 말해도 될까요?

  • 입력 2001년 6월 22일 16시 50분


친구 사이에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요? 영화 '친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미안한 상황에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그래야 꼭 진정한 친구인 듯한 느낌을 주는 코너들이 잇달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6월 21일 밤, '명성황후'에 이어 '스포츠 중계석'을 지나 '夜! 한밤에'를 봅니다. 이 유치한 제목을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빠집니다. 어렸을 때, 말장난으로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셨다'를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셨다'로 바꿔 부르던 적이 있었지요. 이 제목을 볼 때마다, '야! 한밤에'라는 제목은 되고 '야한 밤에'라는 제목은 안 되는 공중파 방송의 한계를 떠올립니다. 또 이렇게 해서라도 '야한' 분위기를 풍겨 시청자를 잡아두려는 발상에 헛웃음을 웃고, 만약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달아날 퇴로를 미리 준비해둔 그 누군가의 세심한 노력에 박수 아닌 박수를 보냅니다.

'보고싶다 친구야'가 시작됩니다. 이 프로그램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두 명의 출연자가 자정을 넘긴 시각부터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카페로 나오라고 요구하는 거지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나오는가, 또 어떤 친구들이 나오는가를 시청자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오밤중에도 연락을 받고 나오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라는 것이죠.

그렇게 불려나온 친구들의 황당한 표정 뒤로 전화를 건 출연자들이 이렇게 속삭일 것만 같습니다.(물론 이건 시청자에게 들리지는 않겠지만) "미안해! 하지만 방송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그러면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누워 꿈나라로 가기 직전에 전화를 받고 나온 친구는 유오성을 흉내내며 이렇게 답할까요? "됐다 마. 친구끼린 미안하다는 말하는기 아이다."

방송이 끝나면 출연자는 틀림없이 오밤중에 불려 나온 친구들에게 미안해서라도 술을 한 잔 사겠지요. 그렇게 그들의 우정이 돈독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건 방송이 끝난 후의 일이고, 불려나온 친구들은 출연자를 위해 졸린 눈을 비벼 가며 이런 저런 칭찬을 해주기에 바쁩니다. 친구니까, 이 정도 어처구니없음과 황당함은 미안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잠들기 직전, 김건모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그도 얼마 전 '보고싶다 친구야'에 나와서 여기저기 전화를 건 적이 있었죠. 신혼인 컨츄리 꼬꼬의 탁재훈까지 불러 놓고 '미안해!' 라고 말하지 않았던(말은 했겠지만 방송되지는 않았던) 그가 "미안해요"를 외칩니다.

이제는 노래만 들어도 뮤직비디오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새벽 5시 55분, 자명종이 울려도 일어나지 못하는 안재욱을 깨워주는 장진영의 크고 맑은 눈동자. 그리고 애틋한 이별. 5년이 지난 뒤 안재욱은 돌아왔지만 장진영은 옛집을 떠났지요. 그리고 새벽 5시 55분에 모닝콜을 부탁하는 안재욱. 모닝콜을 해주는 장진영. 해후, 긴 입맞춤.

이 노래가 특히 30대 주부들에게 인기가 있다죠?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또 하나의 상식 아닌 상식 때문에, 그녀들이 남편들로부터 미안해요 라는 말을 듣지 못해서일 겁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자들의 권위가 높은 만큼 또 많은 실수와 결례를 하기도 하지요. 아내와 어머니에게는 그 만큼의 희생이 강요되어왔고 또 지금도 그런 삶의 방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안해요'를 자주 들으면서, 결혼 후 7년 동안 아내에게 미안해요 라고 말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게으르고 손재주가 없는 탓에 아내를 자주 실망시켰지요. 그런데도 전 무뚝뚝한 갱상도 싸나이답게('친구'의 그 네 사내들처럼) "미안해요"라는 말 대신 오히려 화를 내거나 무시하거나 그도 아니면 집밖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이제는 친구든 아내든, 제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미안해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친구와 아내는 그런 말을 쑥스러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키라는 옛 성현의 말씀처럼, 소중한 그이들을 더욱더 배려해야겠습니다. "미안해요"란 곧 "사랑해요"와 같은 뜻일 테니까요.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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