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에게.
나는 지금 스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를 읽고 있습니다. 츠바이크는 1881년 오스트리아 빈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1942년 망명지인 브라질에서 자살한 극작가입니다. 이 책은 ‘나의 정신적 고향인 유럽이 자멸하는’ 과정을 지켜본 노작가가 19세기 말 완숙한 빈 시민사회의 묘사로 시작, 자신의 61년 생애라는 화폭을 펼쳐 담아낸 한 시대 유럽사회의 거대한 벽화입니다.
한가하게 무슨 ‘어제의 세계’ 냐구요? 아닙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여러 나라에서의 생활을 거친 이 큰 인물의 회고는,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여러 독자가 갖가지 흥밋거리와 교훈을 얻어낼 수 있는 일종의 ‘총체성(totality)’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이 제 마음을 잡아끈 첫째 이유는, 이제 은판 흑백사진의 잔잔한 음영으로만 느껴지는 지난 세기초 예술가들의 모습이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대화를 하고 난 뒤에는 며칠 동안이나 저속한 일이라곤 할 수 없었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대작 ‘장 크리스토프’를 통해 유럽의 하나됨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싶었다는 큰 정신의 소유자 로맹 롤랑을 당신은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나가면서 저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이 거인들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지난 세기 초의 유럽과 빈 시민사회, 그 전아하고 낙관적이면서 세련된 감성의 세계였습니다. 알고 계실겁니다.
레하르의 가벼운 오페레타에서부터 리햐르트 시트라우스의 진지하기 그지없는 대작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의 음악작품을 수놓고 있는 그 세련된 감상주의를, 노을 사이로 별이 뜨는 것 같은, 아스라이 빛나는 그 사그라질듯한 탐미의 감각을 말입니다.츠바이크는 이 반짝이는 감상성과 탐미의 시대를 정밀하고도 장엄한 특유의 필체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훈이 담겨있지 않은 책은 배부르지 않는 사탕과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겠죠. 왜 교훈이 없겠습니까.
츠바이크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터무니없는 낙관주의를 달콤하면서도 씁쓸하게 회고합니다. 20세기초 그가 그려내는 세계는 ‘진보에 대한 신앙’의 세계였습니다. 여러 민족간의 전쟁과 같은 것은 야만의 시대로 역행해 들어가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비행기와 비행선의 발명은 마침내 국경을 허물어뜨리는 세계시민사회의 서곡으로 여겨졌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런데 삽시간에 ‘이성이 패배하고 광포한 야만성이 승리하는 광경을 목도’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와 시대의 동반자 모두가 말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어떻습니까. 충분히 교훈을 얻은 인류는 전쟁으로 치닫지 않을 것이며, 기술의 진보는 더 많은 인간을 행복하게 할 것이고, 자유와 시민권의 확대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여겨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낙관주의는 츠바이크가 그려내는 두 세계대전 전야의 분위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다음 달이면 집을 빼앗기고 수용소에 갇힐 사람들이, 오늘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분주히 뛰어다녔습니다.
그가 던진 질문을 받아,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반세기 이상의 평화에 길들여진 우리는 과연 인간에 대한 인간의 선의를 낙관할 수 있을까요. 우리를 제어하고 있는 이성이 언제까지나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인간은 자기의 종(種)을 결코 파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