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은 역사 정치 판타지 장르를 뒤섞는 형식 실험,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해박함이 독특한 작품세계의 근간을 이룬다.
7년만의 신작소설은 무력한 중년 남성의 쓸쓸한 모습을 담았다. 주인공 한도린은 53세로 정부 출연연구소에서 쫓겨난 뒤 번역일로 근근히 생계를 꾸려가는 전형적인 소시민. 그에겐 심장병이 있는 중학생 딸과 늦게 결혼해서 친척 빵집에서 일하며 가계를 돕는 아내가 있다.
쇠락한 삶에 무기력하던 도린에게 부하직원이자 첫사랑이었던 임정임과 15년만에 만날 기회가 찾아온다. 당연하게도 그는 살뜰한 아내에 대한 현실의 정(情)과 아름다운 애인 정임이 환기시키는 추억의 사랑 사이에서 번민한다.
10여년전 시집을 발표했던 복거일은 이런 주인공의 내적심리 상태를 종종 시의 몸을 빌어 표현하고 있다.
‘마음은 칼날로 세워도 / 부처도 스승도 보이지 않는 자리,/ 새삼 무엇을 죽이리? / 측은한 아내를? / 더 측은한 어린 것을? / 이제 중년이 된 옛 연인을?’
작가는 이 소설을 “시간의 압제에 맞서는 사내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도린은 사랑과 꿈을 소진시켜버린 시간에 돌을 던져보지만 그것은 ‘무력한 항의’일 뿐이다. 세월에 맞설 수 있는 자 그 누구일까.
소설 마지막에 애인 정임과 마법 같은 사랑을 나누지만 도린은 그것이 일회성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주의 시간이 역전되는 1500억년 뒤에 다시 만나리란 둘의 약속은 결국 현생에서는 이룰 수 없는 슬픈 동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석양에 선 쓸쓸한 주인공의 어깨에는 작은 깨달음이 깃들 것이다. 기억이야말로 시간을 뛰어넘는 ‘진정한 마법성’이란 사실, 그것이 땀이건 사랑이건 ‘사람답게 살았다는 기억’이 시간의 압제에 복수하는 길이란 사실.
특히 ‘수국꽃’ 같은 아내와의 애틋한 정이 갖는 공명이 긴 여운을 남긴다. 그 정이란 ‘늘 남편의 뜻을 따르면서도 결국 남편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아내의 현명함에서 나오는 것. 옛 애인과 몰래 만나면서도 도린은 ‘생의 필연성의 그물 속에 갇혀있는 물고기’일 뿐이며 ‘그 그물을 조심스럽게 당기는 어부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애인과 작별하고 돌아온 주인공은 곤히 잠든 아내를 바라보면서 아마 이런 시를 썼으리라.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 침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 할 수 있는 말일 거야’(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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