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손길이 처음 나를 스친다면…. 처녀처럼”
마돈나가 열창한다. 비트도 그리 강렬한 건 아닌데 마돈나는 록가수로 통한다. 노래에 스며있는 저항성 때문이다. 그러니 ‘처녀처럼’도 내숭이 아니다. 사랑에 몰입하는 순간, 강렬하고도 환상적인 그 순간에 ‘나’는 처녀가 되니까. 진정한 사랑은 모두 처녀의 사랑, 첫사랑이다.
김형찬(동아일보 학술전문기자)의 ‘오래된 꿈’은 그렇게 새로운 개념에 대한 갈증이다. 천년이 넘어가는 새로운 세기, 2000년. 숫자는 우연적인 것이지만 인간은 우연한 숫자를 계기로 천년이라는 긴 시간, 영원한 강자를 만들지 않는 그 긴 시간을 두고보면서 이 시대를 묻는다.
문명은 어디까지 선일 것인가, 과학이 세계의 중심이라면 종교는 주변 또는 미신인가. 주류가 옳은 것이라면 비주류는 그른 것인가. 미국이 선이라면 김정일은 악인가. 이성애가 정상적인 것이라면 동성애는 비정상인 것인가. 선과 악을 가르고 ‘남’과 ‘나’를 가르는 이분법은 해체될 수 있을까.
이분법의 최고봉은 디지털이다. 그 디지털시대를 적응하는 우리는 기호인가. 기호인 인간이 어떻게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가. 이 시대에 몸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주의 중심이 몸이라면 몸의 해방은 어떤 것인가. 언어는 세계인데 영어 공용론은 세계를 넓혀가는 것인가, 특정한 세계에 지배당하는 것인가.
김형찬의 ‘오래된 꿈’은 그런 물음들에 대한 길찾기다. 그 물음들은 길찾기여서 여전히 길 위에 있다. 때로는 김형찬을 따라, 때로는 딴지를 걸면서 그 길을 걷다보면 또다른 의문이 생긴다. 선과 악이 뒤집히고 명멸해간 천년이라는 긴 시간을 두고보면 영원한 진리가 없다는 데 허탈해질까,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보일까.
그리고 의문 하나. 자유와 평등과 사랑과 공존이 정말 인간의 오래된 꿈일까. 오래된 꿈이라면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이주향(수원대 교수·철학)